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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 영화관

Film: Special Column2008/07/01 02:13 Posted by ibu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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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릭 저먼 특별전>


* 아래는 <넥스트 플러스>에 기고한 글이다.


죽음을 앞둔 데릭 저먼은 <블루>가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 했다. 80분 가까이 화면을 지배하는 푸른색이 사라질 즈음 저먼은 ‘시간 속에서 우리의 이름이 잊혀질 것이며, 아무도 우리의 작품을 기억하지 않으리라’라고 읊조린다. 그러나 저먼이 푸른색을 화면 가득 배치하면서 고착된 이미지에 대한 부정을 시도했듯이, 그의 탄식 또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부정의 대상이 되고 만다. 그의 이름은 더욱 널리 알려졌고, 그의 작품이 차지하는 자리는 나날이 커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데릭 저먼의 작품들이 5년 만에 다시 우리 결을 찾아올 리 없는 것이다. 6월 27일부터 7월 10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데릭 저먼 특별전>은 그가 남긴 11편의 장편영화 전작을 상영하는 자리다. 여기서 11편 영화의 줄거리를 나불거릴 생각은 없다. 생전에 ‘내러티브 영화의 적’이라 불린 저먼의 영화에서 관객에게 말을 거는 것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내포한 이미지들이다. 영화 안에 줄곧 자신을 투영했던 저먼이기에 강렬한 이미지들은 그가 걸어온 여정의 기록에 다름 아니다. 이 글은 그 여정이 남긴 흔적을 서툴게 뒤쫓는 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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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스찬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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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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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페스트 (1979)


저먼의 모든 영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은 동성애의 이미지, 동성애에 대한 언급이다. 기숙학교 시절, 다른 소년과의 관계에서 목가적인 사랑을 발견했으나 기성세대로부터 끔찍한 존재로 취급받았던 저먼은, 성인 남성간 동성애 행위의 합법화 법안이 통과되고 자유로운 성의 분위기가 지배적이던 1960년대에 청년기를 보내며 성정체성 면에서 자기 확신에 이르지만, 80년대 중반, 호모포비아적인 법령인 ‘28조 법조항’이 입법되는 상황을 지켜봐야 했다. 그런 시기를 통과한 저먼에게 섹슈얼리티는 쾌락과 함께 고통을 상징했고, 관계에 있어 강박적이면서 수동적이었던 저먼은 욕망과 억압의 대립 상황을 경험하곤 했다. 저먼의 영화에서 동성애가 다양한 형태로 제시되거나 심지어 양극단으로 표현되는 건 그래서다.

대표적인 예로, 주디 덴치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읽는 <천사의 대화>가 목가적이고 이상적인 동성애를 다룬 아름다운 작품인 반면, 동성애를 탄압해온 역사의 희생양인 영국 국왕을 등장시킨 <에드워드 2세>는 저먼이 게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던 시기에 만들어진 만큼 분노의 불꽃이 이글거리는 작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를 퀴어 시네마와 연결한 <가든>에서 에이즈 논쟁의 한 중심이던 자신이 직접 출연한 것에서 보듯, 저먼의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게이들은 그의 분신인 양 느껴진다. 실제로 저먼은 <블루>를 찍은 뒤, 든든한 조력자였던 제임스 맥케이에게 “이제야 비로소 나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다”고 고백했다. 역사적인 인물들을 게이 아이콘으로 재해석한 <세바스찬>, <카라바조>, <전쟁 레퀴엠>, <에드워드 2세>, <비트겐슈타인> 등에서 저먼은 그들의 얼굴로 가장했던 것이다. 게이 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된 말년의 저먼은 남성 드랙 교단인 ‘종신 면죄부를 얻은 자매들’로부터 ‘성자’로 시성되었는데, 데뷔작 <세바스찬>이 동성애를 종교로 승화한 성인의 이야기였음을 떠올린다면 가슴 저미는 사실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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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대화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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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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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의 몰락 (1987)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부터 감독 마이클 파웰에 이르는 급진적인 낭만주의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저먼에게 기준점을 제공한 건 16세기 르네상스였다. 대영제국이 몰락하는 과정을 몸소 지켜보았던 그에게 16세기는 양가적인 측면이 있는데, 그 시기를 잃어버린 이상향으로 동경하는 한편 폭력적인 현실의 비극을 잉태한 근원으로 파악하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1세의 눈에 비친 대처시대의 타락한 영국을 그린 <희년>은 바로 그런 인식 아래 출발한 작품이다. 마찬가지로 저먼은, 영국 르네상스의 전형적 인물인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기초로 <천사의 대화>와 <템페스트>를 만든 바 있으나 나중엔 셰익스피어보다 어둡고 급진적인 크리스토퍼 말로의 <에드워드 2세>로 돌아서게 된다.

정원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사랑했기에 정서적으로는 전원시대를 그리워했지만, 반동적인 시각에서 인용되는 엘리자베스 1세 치하의 영국을 이성적으로 해석하고자 고심했던 저먼은 (<희년>에서 엘리자베스 1세의 조언자이자 당대의 사상가로 등장하는) 존 디의 카발라 신비주의에 한동안 심취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거기에다 카를 융의 <심리학과 연금술> 등을 읽으며 연금술 분야에 관심을 기울인 결과, 무의식적인 바탕 하에 시대를 파악하고 표현할 수 있기를 바랐던 저먼은 직관이 철학보다 현실을 더 확실히 깨우치게 해준다고 생각한 것 같다(<비트겐슈타인>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철학 따위는 집어치우고 현실을 개선하라고 말한다).

<희년>, <카라바조>, <대영제국의 멸망>, <에드워드 2세> 등의 작품에서 각 시대가 명확하게 구분되기는커녕 혼재되어 있고, 시대에 대한 묘사도 세세한 디테일을 따지기보다 절충의 방식을 따른 건 그런 연유에서 기인한다 하겠다. 그렇게 완성된 저먼의 실험영화들은 사실주의와 전혀 상관없지만 놀랍게도 시대의 혼란과 위기를 정확하게 기술하고 예언한다. <대영제국의 몰락>에서 소외되고 내쫓기며 처형되는 국외자들, 벤자민 브리튼의 음악을 시적으로 풀어낸 <전쟁 레퀴엠>에서 전쟁터로 내몰려 죽음에 휩싸이는 젊은이들, <가든>에서 현대의 악인으로 묘사된 기업, 교육, 미디어, 경찰의 모습은 저먼이 시대를 얼마나 비판적으로 읽고 있는지 잘 드러낸다. 이들 영화는 자주적인 삶의 방식과 정신적인 독립을 빼앗긴 인간에게 닥친 위협을 빌려 묵시록적인 미래를 경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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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레퀴엠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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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든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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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2세 (1991)

다시 <블루>로 돌아가서, 저먼은 ‘고통스러운 운명’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 질문한다. 그나마 낭만적인 <천사의 대화>에서조차 남자는 내내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니고, <세바스찬>의 세바스찬은 끊임없이 종교적, 성적 박해를 당하고, <희년>의 풋내기 가수는 헛된 유명세를 갈망하다 죽음을 맞고, <템페스트>의 요정은 프로스페로의 손아귀에 걸려 꼼짝달싹 못하고, <카라바조>의 카라바조는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대영제국의 몰락>의 소년은 황폐한 공간에서 헤로인으로 시름을 잊고, <전쟁 레퀴엠>의 무명병사는 죽어서도 철조망에 묶여 있고, <가든>의 게이 연인은 십자가를 짊어진 채 수난의 길을 걷고, <에드워드 2세>의 노동자 피어스 가베스턴은 귀족들의 침 세례를 견뎌야 하고, <비트겐슈타인>의 비트겐슈타인은 타인들의 몰이해와 철저한 고독 아래 신음한다.

그런데 이렇게 고통 받는 사람들의 영화가 비극적으로 아름다운 건 왜일까? 그건 아마도 절망과 두려움에 떠는 그들을 보듬으려는 저먼의 마음 때문이 아닐까 한다. 죽음의 벌을 키스의 꿈으로 바꾼 <에드워드 2세>나 마법을 동원해 낙관적인 상황을 구사한 <템페스트>에서 저먼은 제한적인 수단을 통해서나마 위안을 도모하려 했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내비친 <전쟁 레퀴엠>과 <가든>과 <에드워드 2세>의 마지막 장면에선 꿈을 버릴 뜻이 없음을 명확히 밝혔다.

다시 말하지만, 저먼은 무의식과 직관 속에 앞날을 예견한 인물이다. 푸른 화면으로 시작하는 데뷔작 <세바스찬>이 마지막 작품 <블루>와 이뤄낸 신비로운 조화가 그런 것이며, <희년>과 <대영제국의 몰락>과 <전쟁 레퀴엠>이 또렷이 알아맞힌 미래가 그렇다. 그가 꿈꾼 유토피아가 현재로선 요원해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가 죽을 때까지 간직한 사랑과 그의 염려하는 마음이 맺은 낙관의 힘을 믿는다. 그건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글의 끝을 <비트겐슈타인>의 마지막 대사로 갈음한다. “수수께끼란 없다. 일단 질문을 할 수 있다면 답을 얻는 것도 가능한 법이다.” (ibu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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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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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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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우유소년4L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데릭 저먼 회고전> 이라는 말에 댓글을 달 엄두를 내게 되었네요..
    참 오랜만이고요..
    잘 지내시죠?

    한동안 참 자주 오던 블로그였는데, 뜸해졌네요. 영화를 거의 보지 않고 있고요.

    오랜동안 일을 쉬다가 근래에 취직을 해서 무척 바빠요.
    무언가 다른 것들은 엄두를 못 내네요.

    넥스트 플러스를 손에 쥐어본 지도 참 오래되었어요...

    잘 지내고 있는 건지
    조금은 잘 모르겠네요. : ) ... ...

    건강하시고, 글 또 볼 수 있기를..

    2008/07/02 03:27
    • BlogIcon ibuti  댓글주소  수정/삭제

      간혹 들러주세요. 그러다 글 남겨주시면 그게 더 반가운 거죠.

      새로운 일을 하시게 됐군요. 전 직장이란 데를 다닌 지가 하도 오래 되어서 어떤 기분일지 궁금하네요. 좋은 성과 있기를 바랍니다.

      2008/07/03 17:08
  2. BlogIcon 박노아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Yves Klein Blue가 연상됩니다. 저먼...특별한 분이군요,
    (성정체성에 대한 주제는 제가 그리 즐기지 않지만..)

    오래된 영화는 DVD가 많지 않아 구하는데 어려움이 많지만 한 번 알아보아야 겠어요...
    그래서 영화광들은 오래된 VHS플레이어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좋을 것 같아요.

    2008/07/07 02:49
    • BlogIcon ibuti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시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블루>는 데릭 저먼이 화가 '이브 클라인'에 관한 TV프로그램과 관계하면서 시작된 작품입니다. 저는 역으로 <블루> 때문에 이브 클라인이라는 유명인에 대해 알게 되었고요.

      이번 회고전에 관한 글을 써놓고, 정작 저는 딴 글로 바빠서 가보질 못했습니다. 목요일이면 끝나는데 하루라도 짬을 내야겠어요.

      2008/07/08 01:03
  3. 파니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랫만이요 이부티님 호호 어제 아침에 너무 일찍가니 2시30분부터 상영이더라구요
    작년에 데릭져먼의 가든이란 책을 구입하고 영화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회고전을 하는군요 내일다시 가볼생각이여요

    2008/07/09 11:26

Film: HomeVideo2008/03/01 20:57 Posted by ibu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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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놀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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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우드> 중


<케네스 앵거 작품집 Vol.1> The Films of Kenneth Anger, Vol.1


<제임스 브로튼 작품집> The Films of James Brough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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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가 이러저러해야한다’고 아무도 규정하지 않았던 19세기 말, 인간의 신체와 접촉은 기록의 주요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후 인간의 몸은 필름 그림자의 중심부에서 밀려났다.

   영화가 산업으로 자리하면서 관객은 대상의 나열보다 그것과 이야기의 결합을 원했으며, 윤리와 종교라는 억압과 수치라는 형벌이 인간의 육체를 드러내는 데 제약을 가한 결과, 사진과 회화에 등장하는 모습 그대로의 육체를 필름 위에선 확인할 수 없게 됐다. 신체의 아름다움은 옷과 이야기 뒤로 숨어야만 했다.

   얼마 전 DVD로 출시된 제임스 브로튼과 케네스 앵거의 작품들은 인간의 신체와 시의 기록으로서의 영화가 아방가드르 영화와 언더그라운드 영화 속에 면면히 존재해 왔음을 보여준다. 브로튼의 영화가 주류사회의 관습으로부터 해방된 인간이 되찾은 사랑과 평화 그리고 자유의 시적 표현이라면, 앵거의 영화는 게이의 정체성을 사춘기의 미성숙, 마법, 오페라, 판토마임, 팝 등과 버무려놓은 꿈 혹은 환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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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은 ‘쾌락’이란 주제를 공유했는데, 그것은 육체와 정신이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두 사람은 때론 신비주의와 환각에 빠진 순간을 묘사하기도 했지만, 그들 영화의 가장 순수한 즐거움은 이야기의 강박에 사로잡히지 않은 유연함이 시적 운율(브로튼은 자신의 시를 영화에서 낭독하는 걸 즐겼다)과 음악 위에서 넘쳐흐를 때 최고조에 달한다. 브로튼의 ‘쾌락의 정원’과 앵거의 ‘쾌락의 궁전’은 영화가 잃어버린 낙원에 다름 아니다.

   <제임스 브로튼 작품집>은 <쾌락의 정원> <침대> <드림우드> <헌신> 등의 유명작품을 포함한 전작을 수록했으며, 브로튼의 해설과 시를 모은 책자가 작품의 이해를 돕는다. 테네시 윌리엄스가 “영화가 가장 자극적으로 사용된 예”라고 했던 <불꽃놀이>와 <토끼의 달> <쾌락 궁전의 창립> 등 전기 작품만 수록한 <케네스 앵거 작품집 Vol.1>은 새로 복원된 뛰어난 화질을 자랑하는 것 외에, 앵거의 기억력과 여전한 정력이 놀라운 음성해설, 마틴 스콜세지의 소개와 사진 등으로 채워진 화려한 화보집 등을 부록으로 제공한다. (ibuti, 2007.3. 씨네21 595호)


<제임스 브로튼 작품집> The Films of James Broughton

1948~1988년 / 290분 / 1.33:1 스탠더드 / DD 2.0 영어(일부 무성) / 자막 없음 / 패싯츠(미국, 3장)
< 화질 ★★★  음질 ★★☆  부록 ★☆ >

<케네스 앵거 작품집 Vol.1> The Films of Kenneth Anger, Vol.1

1947~1954년 / 87분 / 1.33:1 스탠더드 / DD 2.0 무성(일부 영어) / 자막 없음 / 팬터마(미국)
< 화질 ★★★☆  음질 ★★★  부록 ★★★★ >


2007/06/21 - [Film: Special Column] - Scene by Scene (3) : 제임스 브로튼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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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Comment2008/02/27 01:08 Posted by ibu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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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y Matters.
But Gay Matters More.


<잘나가는 그녀에게 왜 애인이 없을까 Gray Matters>
 (수 크레이머, 2006) ★★☆


여기는 뉴욕. 그 유명한 ‘Cheek to Cheek’이 흐르고, 두 남녀가 음악에 맞춰 낭만적인 춤을 추면서 영화는 시작한다. 남자와 여자는 <탑 햇>에서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가 추던 대로 따라하고 있다. 둘은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일까, 아니면 캐서린 헵번과 스펜서 트레이시 같이 고전적인 뉴요커 커플일까, 궁금해진다. 한데 두 사람은 커플이 아니라 오누이란다. 떨어져 살기엔 너무나 친숙한 두 사람, 샘과 그레이.


어느 날 강아지 산책용 공원에 나갔던 샘은 찰리를 보고 한눈에 반하고, 둘은 며칠 후 한번의 데이트로 결혼을 약속한다. 결혼이 마냥 기다려지는 샘과 달리, 그레이는 오빠의 성급한 결심으로 인해 혼자가 된다는 걸 받아들이기 힘든 눈치다. 사건은 일주일 후 라스베가스에서 벌어진다. 결혼식 전날 밤, 올케와 시누이 사이가 될 찰리와 그레이는 한 방을 쓰다 취중에 진한 키스를 나눈다. 그레이는 술에 취해 잠든 찰리 곁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생각하기를, ‘내가 혹시 동성애자?’


<잘나가는 그녀에게 왜 애인이 없을까>는 어정쩡한 코미디다. 로맨틱 코미디로 보기엔 내용이 거북살스럽다. 커밍아웃이란 소재에다 근친간의 사랑이라는 문제가 얽혀 마냥 웃으면서 보기엔 군데군데 불편한 부문이 많다. 또한 영화가 주제를 심각하게 다룰 마음이 없으니 근사한 사회드라마도 되진 못한다. 그렇다고 독창성이 돋보이는 코미디 유는 더더욱 아니다. 진부한 대사와 과장된 연기 탓에 90여분이 지루한 영화는 설득력은 물론 재미도 없다.


영화가 그렇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잘나가는 그녀에게 왜 애인이 없을까>는 <섹스 앤 시티>나 우디 앨런의 영화에 나올 법한 인물과 이야기는 죄다 끌어온다. 뉴욕이란 배경, 신경증에 걸린 주인공과 상담의, 광고회사와 병원과 동물공원 등의 직장에서 잘나가는 직장인들, 패션과 다이어트, 수다와 소문, 그리고 패션이 되어버린 소재 ‘동성애’. 그러나 <잘나가는 그녀에게 왜 애인이 없을까>는 그들 소재와 이야기를 진심 없이 적당히 뒤섞고, 난데없는 호들갑과 눈물과 포옹으로 미지근하게 마무리하려 한다.


<잘나가는 그녀에게 왜 애인이 없을까>는 소재주의에 빠진 영화의 전형이다. 영화가 일하는 여성과 커밍아웃한 사람의 고민을 불러냈을 때는 분명 유의미한 결론을 이끌어내야 했다. 결국 기로에 섰던 주인공 그레이와 주변인물들은 우스꽝스런 인물에서 탈피하지 못한다. 영화의 해피엔딩을 보며 즐겁기는커녕 무책임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ibuti)


* 내가 자막을 잘못 읽은 건지, '진저 로저스가 남자배우'란 자막이 자꾸 나온다.

* 그레이가 게이임을 깨닫기 직전에 게이들의 찬가 ‘I Will Survive'가 나오는데,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다름 아닌 글로리아 게이너. 예의 푸근한 몸매와 목소리를 잘 간직하고 있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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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yuki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진저 로저스를 남자로 만들지는 않았고요, "진저 로저스도 아는 남자"라고 나와요 ㅎㅎ

    2008/02/26 09:07
Film: HomeVideo2008/02/24 01:13 Posted by ibu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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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하지 않아>


   여기는, 멀쩡한 퀴어영화를 만들고도 감독이 먼저 나서서 "절대로 동성애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라고 우겨야 하는 이상한 곳이었다. 그러나 이송희일은 <동백꽃> DVD의 인터뷰에서 ‘성적 소수자의 인권문제’에 대해 당당하게 언급하는 사람이다. 그의 존재감이 대단할 수밖에 없으며, ‘정통 퀴어 멜로’를 표방한 <후회하지 않아>는 가장 용기 있고 통쾌한 한국영화가 됐다.

   특히, 동성애적 욕망을 과감하게 선언한 마지막 장면은 눈이 튀어나올 만한 것인데, 지배적인 이성애적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생식기를 부여잡는 행위 앞에서 ‘브라보!’를 외치지 않기는 힘들다.

   오히려 그런 점에서 <후회하지 않아>의 장르적 특성이 가려진 건 안타까운 부분이다. <후회하지 않아>의 딱딱한 대사, 계급 구도, 뻔한 신파를 탓하는 사람은 도대체 서크와 파스빈더의 멜로 드라마를 보지 않았단 말인가? 관객과 주제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는 <후회하지 않아>는 못마땅한 현실을 뚜렷이 인식하게 만든다. <후회하지 않아>는 지금 이곳의 게이 문화에 관한 인류학적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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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칠고 어두웠던 스크린의 영상이 부드럽고 밝은 톤으로 바뀐 것에 대한 호불호를 차치하면, <후회하지 않아> DVD는 독립영화 홈비디오에 대한 인식을 바꿀 만큼 잘 만들어졌다.
 
   두 개의 음성해설- 감독, 제작자와 배우의 것과 감독, 제작자와 팬 카페 회원, 게이 인권운동단체 회원의 것- 이 지원되는데, 둘 다 워낙 원색적이어서 ‘미성년자 접근금지’ 딱지를 붙여야 할 정도다. 시종일관 즐거운 수다를 늘어놓는 제작자 김조광수와 영화이야기로 돌리고자 애쓰는 감독 사이에 앉아 있다는 기분으로 듣다보면 4시간이 후딱 지나간다.

   메이킹 필름(44분), 인터뷰(33분), 삭제장면(15분) 등 영화의 실록에 해당하는 것도 좋지만, 야사로 불릴 부록 또한 인상적이다. 영화의 열풍을 불러일으키는 데 일조한 팬 미팅의 현장(17분), 그들이 외전격으로 만든 두 편의 단편영화 <영화보기 좋은 날>(10분), <야만의 날>(12분) 등은 분명 다른 영화들이 시샘할 것들이다. (ibuti, 2007.3. 씨네21 593호)


<후회하지 않아>

2006년 / 이송희일 / 113분 / 1.78:1 아나모픽 / DD 5.1, 2.0 한국어 / 한글, 영어 자막 / 팬텀(2장)
< 화질 ★★★☆  음질 ★★★  부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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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Garage2007/10/17 18:48 Posted by ibuti

<하드코어 Hardcore>

(데니스 일리아디스, 2004)

추천별점 : 미정

개봉예정일 : 2007년 1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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