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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 영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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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1/08 색, 계 (이안, 2007) : 죄를 증명하는 몸뚱이 by ibuti (6)
Film: Comment2007/11/08 13:22 Posted by ibu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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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pus Delicti

<색, 계  色, 戒> (이안, 2007) ★★★★☆

불이 꺼진 뒤, 난 당황했다. 영화가 너무 무난했기 때문이다. 도입부를 지나 한참을 가도 <색, 계>는 잘 만든 시대극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허우샤오시엔과 관금붕을 매혹시킨 바 있는 장애령의 작품과 이안의 만남에서 근사한 결과물을 기대한 나는, 이건 아닌데 싶었다. 그리고 급진적인 영화를 탐욕하는 칸영화제의 정반대 위치에서 종종 웰메이드 드라마를 선택하는 베니스영화제를 의심했다. 과연 누구의 행보가 현명한 것일까?

<색, 계>에서 어떤 균열을 느낀 건, 그래서 눈을 반짝이게 된 건, 예상하지 못한 장면부터였다. 그건 정망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홍콩의 친일파 앞잡이 ‘이’를 죽이기 위해 ‘왕치아즈’는 막부인 행세를 하며 접근하는데, 그녀는 막상 성경험이 없다. 그래서 학생조직의 동료 중 유일하게 성경험이 있는 남자와 성관계를 맺는다. 왕치아즈는 다른 남자, ‘광위민’을 사랑하면서도 과업 수행을 위해 전혀 원하지 않는 남자와 육체의 문에 들어서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와 까닭 모를 성관계를 지속한다. 이어 그들의 첫 번째 과업이 실패하자, 왕치아즈는 조직에서 떨어져 무력한 나날을 보낸다.

3년이 흐른 뒤, 광위민과 재회한 왕치아즈는 조직의 령을 받는다. 마침내 왕치아즈는 이와 상하이에서 첫 성관계를 맺게 되는데, 관계를 가진 뒤 왕치아즈는 의미를 짐작하기 힘든, 아주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이가 자신을 그토록 간절히 원했다는 것에 대한 만족감, 그래서 과업을 수월하게 수행하겠다는 자신감, 아니면 그렇게 짐승 같이 욕구를 푸는 인간이라면 양심의 가책 없이 관계를 가져도 되겠다는 안심? 그녀의 미소가 그 중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왕치아즈는 또 한번 원하지 않는 남자와 몸을 거래한다. 그녀의 섹스에는 사랑은커녕 욕망마저 결여되어 있다. 그녀는 육체의 결합이 주는 판타지를 알지 못하며, 그녀의 육체는 상대편의 마음과 소통할 길을 잃는다.

관계에 부자연스러운 것은 이도 마찬가지다. 왠지 아내와도 정상적인 성관계가 없을 것 같은 그는 안팎으로 타인과 진정한 교류를 맺지 못한 삶을 산다. 하지만 그는 겉으론 욕망의 흔적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세속적인 관계에 대해 초연한 듯 행동한다. 그의 본모습이 드러나는 건 왕치아즈와의 첫 관계 때다. 풀지 못한 욕망을 터뜨리는 그의 행동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영화 역사상 여자를 가장 거칠게 다룬 예로 기억될 정도다. 그런데 그의 몸이 취하는 바는 이후에도 별반 변할 줄을 모른다. 왕치아즈와 섹스를 나누는 그의 몸에서는 욕망의 덩어리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걸 가지고 둘의 관계에 대해 구태여 투덜거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 광위민에 대한 애정을 다른 방식으로 수행한다고 보면 될 것이고, 몸에 굶주린 남자의 욕망 해소도 나름대로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관계의 진정한 문제는 ‘믿음의 부재’에 있다. 그런 점에서 <색, 계>의 두 사람은, 비슷한 시대를 공유하는 또 다른 밀회의 이야기인 데이비드 린의 <밀회>와 이안의 전작 <브로크백 마운틴>의 인물들과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밀회>와 <브로크백 마운틴>의 주인공들은 세상에 들키면 안 되는, 세상으로부터 금지당한 사랑을 나누지만, 두 사람만의 공간에 들어서면 무조건적인 믿음을 나눈다. 바로 앞에 있는 상대에게서 느끼는 편안함, 숨결이 들리는 상대편에 대한 조건 없는 믿음. 그것이 왕치아즈와 이에게는 없다. 관계의 어긋남은 육체가 아닌 마음에서 비롯된다. 둘 만의 공간에 있게 되었을 때, 이는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왕치아즈에게 묻는다. 왕치아즈는 "증오한다"고 말하고, 이는 그녀의 말을 믿는다고 말한다. 왕치아즈는 은연중에 그를 신뢰하지 않음을 드러내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왕치아즈가 솔직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폭력적인 관계가 아니라면, 모든 육체적 관계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모든 걸 드러내고 나누는 행위다. 그러나 둘은 그러지 못한다, 그럴 수 없다. 격렬한 관계를 나누는 두 사람의 육체는 이른바 ‘죄체(Corpus Delicti)' 혹은 ‘죄를 증명하는 몸’일 뿐이다.

그럼에도 둘은 육체의 관계를 지속한다. 이를 믿지 않는 왕치아즈는 그가 자기를 신뢰하게 되길 바라면서, 왕치아즈를 믿지 않았던 이는 옅으나마 믿음을 가지게 되면서, (동양배우로선 연기하기 힘들었을) 적나라한 육체적 관계가 계속된다. 여자의 가면은 점점 더 두터워 가고, 남자의 가면은 점점 엷어진다. 더욱 대담해지는 관계에 따라 그들 사이의 의심, 도덕율은 조금씩 무디어지겠지만, 그것과 반대로 보는 사람들의 고통과 혼란은 심해진다. 무의미할 정도로 허전한 육체적 관계가 계속되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인 것이다. 그냥 처절하다, 그래서 쓴웃음이 나온다.

그녀의 첫 번째 성관계가 그랬듯이, 관계의 정점은 정녕 이상한 곳에서 벌어진다. 그리고 그 정점의 순간이 관계의 종말을 부른다. 그 곳은 이가 왕치아즈에게 선물한 반지의 세공이 끝난 자리이자 이의 죽음이 예고된 자리다. 왕치아즈는 (세상이 험난하니) 반지를 조심해서 끼겠다고 말한다. 그 때, 이는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당신을 지키겠다고 말한다. 남자를 경계하던 여자는 이제 세상을 경계하는데, 여자를 경계하던 남자는 도리어 여자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는 이제 그녀를 믿게 된 것일까, 그녀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를 철저하게 믿지 않았던 자신을 되돌아본다. 이가 그 말을 내뱉고 그녀가 그 말을 들었던 단 몇 초가 그녀가 그를 신뢰한 유일한 시간임을, 왕치아즈는 알게 된다. 그 순간의 끝에서 그녀는 그에게 처음으로 진실을 전한다. 짧은 몇 마디 말. "가요... 어서"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는 부서진다.

<색, 계>의 비극은 예고된 것이지만, 슬프다. 지독한 욕망과 허위로 서로를 탐했던 두 사람은 결국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간 동안 진실한 마음을 나눈 인물로 남는다. 그들이 정말 경계해야 했던 건, 색, 즉 욕망이 아니라, 계, 즉 서로를 경계하는 마음이었다. 죽음의 문턱에 선 여자가, 홀로 남겨진 남자가, 마지막 순간에 깨달은 건 바로 그 마음일 것이다. 한데, 그 바탕에는 시대의 그림자가 있다. 왕치아즈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채석장의 어두운 물구덩이는 두 사람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든 시대의 메타포에 다름 아니다. 또한 1942년 상하이에서 벌어진 비극이 옛 이야기로 남지 않는 건, 지금 더욱 유효한 그 서늘한 주제 덕분이다. 1942년 상하이의 비극은 애정과 믿음 없이 욕망을 탐하는 현대인의 비극이기도 하다. (ibuti)

* <색, 계>를 처음 본 건 10.23일 시사였고, 글을 쓴 건 11월이 지나서였다. 오늘, 그러니까 11월 10일에 영화를 다시 보니, 잘못된 기억이 몇 부분 있었다. 그래서 글 중 일부를 수정했음을 밝힌다.
* 극장별 화질의 차이가 심하다. 용산CGV에서 보았던 것에 비해 일산시너스의 화질은 암부표현이 좋지 못했다.
* 왕치아즈가 전차밖으로 손과 얼굴을 내밀어 비를 맞는 장면이 있다. 이 아름답고 슬픈 장면을 왜 처음엔 잘 보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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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色. 戒

    Tracked from 어린이는 어른의 어버이  삭제

    <色. 戒> 이안 감독, 양조위, 탕웨이 주연 대학로 CGV 오후 3:10 사람들은 왜 같은 영화를 보고 다른 이야기를 할까. 같은 것을 앞에 두고 다른 것을 기억할까. 나는 이 영화의 연인들이 <화양연화>의 연인들 보다 가슴이 아팠어. 하고 말하면 "그게 무슨 소리야?" 라는 말을 들을까. 그게 남자와 여자가 헤어지게 되는 이유일까. 서로 다른 것을 보고 다른 것을 기억하고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기를 하기 때문에. 하지만 ibuti님의 영화평에..

    2007/11/11 00:32
  2. Subject: 색, 계 (色, 戒, 2007) - 그녀의 마음을 무너뜨린 한 마디

    Tracked from Different Tastes™ Ltd.  삭제

    ★★★★☆ <색, 계>와 가장 유사한 영화로 <스타 워즈> 시리즈를 꼽고 싶습니다. 외세에 저항하는 반군들의 이야기이고 특히 홍콩 대학 출신의 젊은 스파이들이 목표물로 삼고 있는 매국노 이(양조위)가 다스 베이더의 포스를 뿜어대고 있기 때문이죠. 루크 스카이워커와 다스 베이더의 관계가 적대적인 관계에서 부자 관계로 전환되는 부분과(정확히는 부자 관계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지만요) <색, 계>에서 왕 치아즈(탕웨이)와 이의 관계가 단순한 남녀 관계..

    2007/11/11 23:20
글이 어땠나요? 당신의 의견을 듣고 싶어요.
  1. BlogIcon 우유소년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음이 아프네요..

    2007/11/08 22:27
    • BlogIcon ibuti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런, 제 글 때문입니까? ㅠㅠ
      우유소년님은 <색, 계>를 보셨는지요. 찬반 진영으로 나눠 이야기하기에 좋은 영화란 생각입니다.

      2007/11/08 23:38
  2. BlogIcon 우유소년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제 보게되었어요 이 글 읽은 후 우연찮게.. 그런데..
    "둘만의 공간에 들어섰을 때 ... 왕 치아즈는 이를 혐오한다고 말하고, 이는 그녀의 말을 신뢰한다고 말한다. ... 이는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왕 치아즈가 솔직하다고 생각하는.. "
    저는..
    그 장면을
    왕치아즈"내가 당신을 증오한다고 말한다면.. ?" 이"돌아왔잖아" 왕치아즈"당신을 증오해요.." 이"너를 믿어 너를 믿을거야 세상에 내가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이런 느낌으로 기억하는데.. 이가 치아즈에게 말 없이 상해 출장을 다녀왔었고 그때 작은 방에서 왕치아즈가 조금 흐느끼듯이 말하는 대사

    2007/11/10 23:03
    • BlogIcon ibuti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맞습니다.
      오늘 저도 이 영화를 다시 봤어요. 그래서 글의 그 부분이 오류임을 알게 됐고, 방금 수정했습니다. 수정하고 오니 우유소년님의 지적이 있네요. ^^

      2007/11/11 01:42
  3. BlogIcon 우유소년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친구들과 봤는데 다들 저와 다른 눈으로 본 것 같아요 이 글을 보면서도 다들 다르게 받아들이는구나 감정선이나 관계.. 그런 것들. 하지만..
    이 글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게 되어서 더 마음 아픈 순간이 저에게도 있었다는 걸
    아신다면
    기뻐하시려나요.. ? ^ ^

    궁금했었거든요 결국 세상에서 짧은 순간 가장 진실한 마음을 나눈 두 사람으로 남는다.. 그 짧은 순간의 진실한, 그런 말이 뭘까 어떤 말을 했을까..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나서
    그 말.. 이었구나.. 해서 나중에 울음이 나왔어요..

    2007/11/10 23:14
    • BlogIcon ibuti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늘 같이 본 친구는 이 영화가 참 심심하다고 했어요. 하긴 그럴 거예요. 겉으로 보면 정말 단순한 이야기잖아요. 저도 그래서 이 영화의 별점을 몇 개 줘야 하나, 한참 망설였습니다.

      오늘 다시 보면서 가장 슬픈 장면은 그녀가 인력거를 타고 돌아오는 마지막 장면이었어요. 죽음의 약을 꺼내서 만지던... 두려워하진 않았을 거예요. 극중 대사에도 나오지만 그녀는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그녀는 그 때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2007/11/11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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