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츠 랑 회고전>
* 아래는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열리는 ‘프리츠 랑 회고전’을 맞아 필자가 ‘넥스트 플러스’ 50호 (2008.4.25)에 기고한 글이다.
프리츠 랑의 <달의 여인>(1929)에 등장하는 미치광이 교수는 감독을 닮았다. 지구상의 누구보다 달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잘 아는 교수의 진짜 바람은 달에 묻힌 금을 캐오는 것이다. 초라한 형편 탓에 꿈을 실현시킬 방안이 없는 그는 부유한 제자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 프리츠 랑도 그랬다. 당대의 어떤 감독보다 시대와 예술에 대한 비전을 갖췄던 랑은 영화가 대중을 위한 예술이라는 사실 또한 깨달았지만, 영화를 만들기 위해 이곳저곳을 떠돈 그의 인생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랑에 대한 잘못된 해석은 대부분 관객의 독일영화에 대한 오해와 거의 일치한다. 걸작 독일영화라고 하면 바이마르 시대의 영화를 반사적으로 떠올리는 관객에게 랑은 표현주의와 <메트로폴리스>의 감독으로만 인식됐으며, 그가 할리우드에서 만든 영화들은 한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유럽에서 할리우드로 건너간 에른스트 루비치와 알프레드 히치콕이 성공을 맛볼 동안 고집 센 망명자 정도로 취급당하던 랑이 <카이에 뒤 시네마>에 의해 재평가되기까진 오랜 시간이 흘러야 했다.
랑 영화의 복원과 회고전이 활발해진 것도 근래의 상황인데, 회고전을 준비하는 측이 개최만큼이나 역점을 둬야하는 중요한 부분은 40여 편의 영화를 특정 시기에 치우치지 않고 소개하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5월 9일부터 25일까지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열리는 <프리츠 랑 회고전>은 주목할 만하다. 상영작의 수가 무려 19편에 이르거니와, 초기작 <운명>부터 유작 <마부제 박사의 천 개의 눈>에 이르는 넓은 스펙트럼은 랑을 만나기에 더 없이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상영작들은 하나같이 어두운 비전을 띤 작품들로서, 그 배경을 알기 위해선 랑이 통과한 시간과 사건을 추적할 필요가 있다. 독일이 패전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데뷔한 랑은 나치가 득세하자 프랑스로 도망가야 했고, 이어 대공황의 기운이 가시지 않은 미국에 건너가선 과거의 영광을 포기해야 했으며, 냉전 시대엔 블랙리스트의 간접 피해자가 되기도 했다. 그런 그의 작품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사신과 싸우는 여인의 이야기인 <운명>은 어쩌면 랑이 자신의 운명을 예견한 작품일지도 모른다.
‘우파 스튜디오’의 어마어마한 재원을 총집결해 영웅 신화를 재구성한 <니벨룽겐의 노래>, 노동자들이 노예로 전락한 미래사회를 형상화한 <메트로폴리스>, 그리고 <운명>을 ‘죽음’이란 주제로 묶는다면, 범죄의 대가로 분한 루돌프 클라인 로게가 공포를 통해 사회와 국가를 마음대로 주무르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인 <마부제 박사 1, 2부>와 <스파이>를 묶는 주제는 ‘범죄’다. <엠>으로 연쇄살인마와 현대도시의 기이한 지형도를 그리며 표현주의와 이후의 누아르를 연결한 랑은 할리우드에 입성하면서 미국이 얼마나 암울한 곳인지 탐구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 범죄 드라마 <한 번뿐인 삶>과 뮤지컬 <당신과 나> 등을 발표한 랑이 1940년대 이후 진입한 곳은 훨씬 비관적이고 폭력적인 세계였다. <사형집행인 또한 죽는다>, <공포의 내각>, <창가의 여인>, <진홍의 거리>는 그 시기의 대표작이다. 1950년대에 냉전시대의 억압된 정서가 반영된 <빅히트>, <블루 가디니아>, <인간의 욕망> 등을 연출한 것을 마지막으로 랑은 미국을 떠나게 된다(이번 회고전에서 같이 소개되는 고전적인 모험 활극 <문플릿>은 다소 예외적인 경우다).
독일로 돌아간 그가 유작으로 남긴 <마부제 박사의 천 개의 눈>은 영화, 미디어, 이미지, 현대사회에 대한 실로 사려 깊은 목소리였다. 다시 처음으로 가서 질문해보자. 랑은 예언자인가, 단순한 목격자인가, 아니면 비주얼에 도통한 기교가인가. 20세기 중반 이후의 영화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한 감독은 장 뤽 고다르다. 그렇다면 이전의 감독 중 그 위치에 오를 사람은 누구일까? 그 대답은 앞선 질문의 대답에 따라 달라질 터, 회고전에서 각자의 답을 구해보길 바란다. (ibu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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