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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 영화관

Film: Special Column2008/05/08 13:00 Posted by ibu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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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 타르 회고전 (Bela Tarr Retrospective)


* 아래는 제9회 전주국제영화의 프로그램 중 하나인 <벨라 타르 회고전>과 관련해, 영화제 측에서 발행하는 일간지 ‘온감(On感)’에 기고한 글이다.


* 밝혀야 할 부분이 있다. 5월 6일, 나는 벨라 타르와 인터뷰를 했는데, 인터뷰 도중 나의 견해가 상당 부분 감독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아래 원고는 5월 2일에 쓴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글 도중 별도 마크해두었다. 인터뷰 기사는 따로 올릴 예정이다.

   <레드>와 <사탄탱고>가 같은 해에 나온 것은 사뭇 의미 깊은 사건이다. 동구권영화를 이끌던 세계적인 감독인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가 유작을 발표하고 사라진 자리에서 그의 바통을 이을 한 감독이 뒤늦게 예술영화계의 중심인물로 부상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벨라 타르의 <사탄탱고>는 흔히 ‘악마적인 걸작’으로 불린다. 문제는 타르의 영화를 접하는 관객에게 ‘걸작’보다 ‘악마’의 인상이 더 강하게 남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탄탱고>에서 가장 악명 높은 장면은 ‘비좁고 지저분한 집안에서 관찰하고, 쓰고, 읽고, 깜빡 졸고, 화장실에 가고, 술을 마시는 거구의 의사’를 보여주는 데 물경 30분이 넘는 시간을 할애한다. 어지간한 롱테이크에 익숙한 사람도 타르의 영화를 보다 나가떨어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러나 악마의 얼굴이 두려워 걸작과의 대면을 미룬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타르를 이야기할 때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와 키에슬로프스키의 이름이 종종 거론되는 건 예술적 성취 때문만이 아니다(이에 대한 진실과 오해는 아래에서 말하도록 하겠다). 그들은 예술 이전에 인간에게 깊은 관심을 가졌고, 고통 받는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한 사람들이다. 타르 영화의 진경은 형식주의 너머로 그의 마음을 이해할 때에야 눈앞으로 펼쳐진다는 걸 우선 명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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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르의 초기영화들은 이후 작품들과 외형상 전혀 다르다. 1970년대 중반, 헝가리의 젊은 영화인들은 기존 영화판에 대항해 다큐멘터리와 픽션이 혼합된 장르를 도모했는데, 영화학교에 다니면서 장편영화를 연출한 22살의 타르도 그런 경향을 따랐던 것. ‘가정 삼부작’으로 알려진 초기의 세 영화는 타르가 비전문 배우들과 함께 핸드헬드 카메라, 16미리 흑백필름, 극도의 클로즈업으로 일상의 사람들을 담으려던 시절의 결과물이다.

부모의 집에 얹혀사는 부부, 사회의 주변부를 겉도는 남자와 절박한 아내, 집을 마련한 중산층 부부가 각각 등장하는 <패밀리 네스트>, <아웃사이더>, <불안한 관계>는 일견 사회문제를 파헤친 드라마로 보인다. <패밀리 네스트>의 부부는 아이와 단란한 생활을 꾸릴 아파트를 열망하지만, 주택난 탓에 그들의 보금자리는 쉬 마련되지 않는다. <아웃사이더>의 주인공은 하루하루를 쉽게 살아가려는 남자인데, 아내는 그의 경제적인 무능력함이 지긋지긋하다. 집이 있는 부부가 나오는 <불안한 관계>에서도 해외근무 지원 문제로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벌어진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세 부부 관계의 악화는 아파트나 경제문제 같은 외적 조건이 아닌 다른 원인에서 기인한다. 며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시아버지와 아내를 의심하는 남편, 사회의 요구에 적응하지 못하는 남자와 그의 형제와 잠자리를 한 아내, 가족의 무게를 견디기 힘든 남자와 그를 배려하지 못하는 아내는 문제의 근원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 채 결말을 맞는다. <패밀리 네스트>의 부부는 눈물로 재결합을 갈망하고, <아웃사이더>의 남자는 2년간의 군복무 후의 변화를 기대하며, <불안한 관계>의 부부는 화해를 축하하는 의미로 세탁기를 구입하면서 세 영화는 끝난다.

중요한 사실은, 세 편 영화의 인물들에게 바뀐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 타르가 시선을 넓혀 보다 보편적인 문제를 인식하게 됐다는 것이며, 그것에 맞춰 영화의 형식적인 변화가 필연적으로 뒤따랐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스타일 면에서 판이하다는 이유로 타르의 초기영화와 이후 작품들을 굳이 구분 지을 필요는 없다. 좁은 아파트 내에서 발생한 문제들이 인간관계에 대한 폭넓은 질문으로 확장되었을 따름이다.


   (단 두 개의 쇼트로 이루어진 실험적인 중편 <맥베스>와) <가을>은 앞뒤 작품들의 연결부라기보다 과도기적인 성격이 강한 작품이다. 아파트 내부에서 벌어지는 인간들의 (권력) 다툼은 초기의 삼부작을 기억하게 하지만, 타르는 다큐멘터리의 흔적을 의도적으로 제거하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은 고급 아파트를 소유한 병든 노파와 그녀의 재산을 탐하는 아들, 노파에게 주사를 놓는 간호사와 그녀의 연인, 그리고 노파에게 빌붙게 된 선생이다.

아파트 밖으로 절대 나가지 않는 카메라는 편집증에 사로잡힌 그들 다섯을 프레임 안으로 옥죄면서 관객의 밀실공포증을 유발하는데, 타르의 영화 중 보기 드문 심리드라마인데다 제한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실내극의 형식을 띄고 있어서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영화가 연상되기도 한다. 부감 쇼트, 앙각 쇼트 등 다양한 카메라 앵글과 협소한 공간을 보완하는 카메라의 움직임,  양식화된 조명과 색채의 구성, 연극 톤의 대화 등을 구사해 한 편의 실험영화를 보는 듯한 <가을>은 감독의 형식에 대한 점증하는 관심이 반영된 작품이라 하겠다. 언젠가 타르는 자기 영화가 코미디라고 말한 적이 있다. <가을>의 결말부를 장식하는 <Whatever will be(케 세라 세라)>는 그 말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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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멸>과
이후 공교롭게도 7년 간격으로 발표된 영화들은 관객과 평단의 머릿속에 타르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파멸>, <사탄탱고>,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를 통해 타르는 대가들의 리스트에 오르는데, 그것은 그가 극한의 형식을 좇는 스타일리스트임과 동시에 현실에서 발을 떼지 않는 리얼리스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파멸>은 탄광 마을에서 허송세월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바에서 술을 마시는 게 일과의 전부인 그는 사랑과 배신, 복수 끝에 삶의 밑바닥에 다다른다. 탱고의 12 스텝에 상응하는 12개의 챕터로 구성된 <사탄탱고>는 외딴 집단농장에서 벌어지는 섬뜩한 음모와 인간관계의 실패와 믿음의 부재에 관한 드라마다. 7시간의 지독한 우울 끝에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굴레와 직면하는 관객은 울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하는 기이한 수렁에 빠지고 만다.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는 타르의 미적 시도가 절정에 오른 걸작이다. 시골 마을에 유랑 서커스단이 도착한다. 세상에서 가장 큰 고래와 일명 ‘왕자’가 동반 출연한다는 약속과 달리, 왕자는 기대처럼 아름다운 존재가 아니었고, 흉측한 고래가 덩그러니 도착하자, 사람들 사이에 폭력의 기운이 싹트고, 마을의 밤은 종말을 향해 치닫는다.


세 영화를 두고 먼저 언급해야 할 부분은 영화의 형식이다. 카메라의 움직임은 기존의 어떤 영화보다 느리고, 어느 순간 멈춰 선 카메라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영화의 시간 개념에는 흥미가 없다는 듯, 타르는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시간과 공간의 지속성이 기필코 보장되어야 한다고 본다(타르에게 롱테이크는 미적 개념이 아니다). 설령 관객의 인내에 반하고 이야기의 전개에 방해가 된다 할지라도, 타르는 인간의 행동은 물론 그 아래 위치한 동기, 심리까지 철저히 파악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릴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또한 타르가 말했던 바, 그는 카메라만큼 영화의 외형에 공헌하는 풍경과 날씨 그리고 소리를 제 2의 주인공으로 여긴다. 황폐한 토지와 무너져 내리는 가옥, 추적추적 한없이 내리는 비와 몸을 날려버릴 기세로 부는 세찬 바람, 스크린 안팎에서 삽입되는 자질구레한 음향, 아코디언에 기반을 둔 구슬픈 음악은 인물이 처한 현실과 비극을 적나라하게 밝히는 주요한 장치로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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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건대 타르 영화의 형식주의를 외형과 아름다움에 도취한 자의 헛된 산물로 보면 곤란하다. 그에 따르면, 그의 영화의 목표는 이야기하기가 아니라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 사람들의 매일의 삶을 이해하는 것’에 있다. 타르에 대한 오해 중 하나는 그의 세계가 타르코프스키와 키에슬로프스키의 그것과 같은 영역에 속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기실, 타르의 영화는 삶의 신비나 형이상학적인 질문에는 일차적인 관심을 두지 않는다(굳이 타르와 가장 가까운 거장을 선택해야 한다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적절한 대답일 것이다).

이 사실은 타르가 <파멸> 이후 소설가 라즐로 크라스나호르카이와 공동으로 작업하고 있다는 걸 감안했을 때 언뜻 이해하기 힘든 부분인데, 두 사람은 정치적 알레고리와 현실에 대한 은유로 가득하다는 크라스나호르카이의 작품에다 영화의 옷을 입히면서 기존의 추상적인 관념을 다 버리고 현실의 문제라는 단순하고 명확한 세계로 진입하도록 해놓았다.

부언하자면 타르는 자신의 영화가 우의적이고 상징적인 상태에서 탈피해 ‘명확한’ 존재가 되기를 원한다.
삶의 실체에 명쾌하게 접근한 그의 영화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우리는 왜 현재의 모습처럼 되어버렸는가, 우리는 왜 죄를 짓고 사는가, 우리는 왜 서로를 배신하는가, 우리는 왜 하찮은 물질을 탐하고 그것에 집착하는가, 우리는 왜 삶의 질을 추구하지 않는가, 우리는 왜 몰이해, 반목, 갈등, 다툼, 의심, 폭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가.’ 그런 이유로,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에서 노동자들이 병원으로 난입하는 장면은 타르가 이룩한 최고의 성과라 칭할 만하다. 욕구를 억제하지 못해 죄 없는 환자들을 닥치는 대로 구타하던 폭도들은 발가벗겨진 채 남루한 모습으로 서 있는 노인을 보자 폭력을 멈춘다. 그들은 자신의 초라하고 구차한 현실을 직시했던 것이다. (* 이 부분에 대해 감독은 ‘뒤에 벽이 있어서 멈춘 것이다’라고 했다. 인터뷰에서 구체적인 것을 확인하길 바란다)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첫째는 타르의 영화가 우울한 현실을 확인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냐는 것이고 둘째는 명확하게 만들었다는 타르의 영화를 해석하는 게 왜 그렇게 힘드냐는 것이다. 타르의 영화가 우울한 비전과 세상을 향한 비관을 보여준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관객의 눈을 믿는 타르는 자신이 먼저 대답을 들려주지 않으려 한다. 자신은 솔직하고 공평하며 정직한 영화를 만들 뿐, 그것을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며 이성으로 자각하는 사람은 관객이라는 것이다. 타르가 어떤 감독이냐면, 관객이 자기 영화의 동반자라고 항상 믿는 사람이다.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해서 그가 결코 책임을 회피하려는 게 아님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해석이 쉽지 않은 영화는 그의 의도를 따른 것이다. 우리 주변엔 타르의 영화 속 상황보다 더 이해하기 힘든 일들로 가득하다는 걸 우리는 잊고 있다. 사람들은 쉽게 풀지 못하는 문제로부터 눈을 돌리기 십상이고,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하나둘 쌓일 때마다 사회는 더욱 못마땅한 곳으로 변해 간다.
타르는 관객들이 자신의 영화를 본 뒤 해석을 위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세상을 다른 시선으로 보지 않으면, 다른 삶을 이해하고 경험하지 않으면 혁명 혹은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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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르가 2007년에 발표한 <런던에서 온 사나이>는 주류 평단으로부터 호평을 얻지 못했다. <파멸>에서 누아르 장르를 존재에 대한 심오한 질문으로 연결했던 타르가 다시 시도한 누아르는 전작들에 비해 평범한 이야기하기에 머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런던에서 온 사나이>는 타르의 또 다른 변화가 감지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충분한 작품이다.

그간 타르의 영화엔 신 또는 신의 대리인으로 행세하는 인물이 등장해왔다. <가을>의 노파, <파멸>의 술집 종업원, <사탄탱고>의 지도자,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의 백치 소년은 사건과 인간관계를 꿰뚫고 있으며, 다른 인물들에게 지혜의 말씀과 조언을 들려주는 캐릭터들이다. 그러나 종래엔 그들조차 편협함과 미약함과 사악함의 얼굴을 내밀고 급기야 정신을 잃는 상황에 도달하는 걸 보면서, 아직까진 구원이 요원한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런던에서 온 사나이>에서 이에 해당하는 캐릭터는 수사관인데, 그는 놀랍게도 인간을 향해 자비를 베푼다. “몸을 보살피라”는 말로 염려를 표하고 용서의 기적을 행하는 인물은 이전의 타르 영화에 없었으며, 타르의 영화를 보다 따뜻한 심성을 느낀 것도 아마 처음일 게다. 타르 영화의 오프닝에는 영화를 헌정할 사람의 이름이 소개되곤 한다. 타르는 이번 영화를 만드는 도중 자살한 제작자 윔베르 발상에게 <런던에서 온 사나이>를 바쳤다. 그래서일까, 영화에는 적으나마 낙관의 여운이 남아 있다. 그것이 필자의 생각대로 변화의 조짐일지 아닐지는 그의 다음 작품만이 말해줄 것이다. (* 위 두 단락에서 언급한 캐릭터와 <런던에서 온 사나이>에 대한 감독의 해석은 내 글과 정 반대의 것이었다. 역시 인터뷰에서 확인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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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14 - [Film: HomeVideo] - 사탄탱고 (벨라 타르,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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