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ight Future
도쿄 소나타 Tokyo Sonata (구로사와 기요시, 2008) ★★★★☆
구로사와 기요시는 대개 자신의 오리지널 각본으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특이한 건, 그가 간혹 다른 사람의 원작을 영화화할 때 서양인과 인연을 맺는다는 점이다. 마크 맥셰인의 원작소설을 각색한 <강령>이 그 경우에 해당하는데, 근작 <도쿄 소나타> 또한 낯선 서양인이 쓴 각본을 재각색한 것이다. 더군다나 <도쿄 소나타>의 외형은 ‘가족 드라마’다. “내 영화의 칠팔십 퍼센트는 장르영화다”라고 스스로 밝힐 정도로 공포영화에 매진해온 구로사와 기요시가 어떻게 해서 일가족이 주인공인 비장르영화를 연출하게 된 것일까? 그 사정을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도쿄 소나타>의 오리지널 각본을 쓴 사람은 맥스 매닉스다.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남자가 한때 일본에서 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도쿄의 평범한 가족이야기에 처음 관심을 가진 회사는 예술영화를 전문으로 제작하는 ‘포르티시모’였다. 그들과 일본의 제작자(이후 홍콩의 회사가 가세한다)가 함께 모여 감독을 누구로 정할지 고민하던 차에 막 그들 곁을 지나던 구로사와 기요시를 점찍었다고 한다. 다행히 구로사와 기요시가 기존의 작업과 다른 ‘새로운 출발점’을 찾고 있던 터였으니, 이상한 선택과 신기한 조합은 그렇게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완성된 영화는 제작사의 결정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얼마 전, 켄지의 아빠는 다니던 직장을 관뒀다. 나이 든 관리자인 그는, 값싼 노동력을 찾아 중국으로 회사를 옮기려는 회사에서 쓸모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자존심에 회사를 때려치운 그는 세상이 호락호락한 곳이 아님을 곧바로 알아차린다. 실직자 지원센터는 구직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무료급식소는 그와 비슷한 사람들로 넘쳐난다. 가족에게 자신의 처지를 알리기 싫어 매일 서류가방을 들고 출근하는 척하던 아빠는 무료급식소에서 옛 친구와 조우한다. 벌써 오래 전에 직장에서 해고당한 친구는 밝은 겉모습과 달리 힘겹게 하루하루를 지탱하고 있었다.
켄지의 형은 집에 있어도 가족과 말을 나누는 법이 없다. 형은 어느 날 미군에 입대하겠다고 선포한다. 힘든 반면 돈벌이라곤 안 되는 아르바이트에 지친 형은 불투명한 진로를 두고 몹시 고민했던 모양이다. 어렵사리 부모의 동의를 얻어낸 형은 입대 직후 이라크에 파병된다. 엄마는 말없이 가사를 꾸려나가지만, 무너져 내리는 가족을 부여안으려 기울이는 노력이 서서히 한계에 부딪힌다. 실직을 숨긴 채 가정 내에서 권위를 지키려는 아버지와 그런 그에게 저항하는 두 아들의 다툼은 엄마에게 버거운 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와 형과 켄지는 엄마가 얼마나 외롭고 힘든지 모른다.
막내아들인 켄지는 하교하다 보았던 피아노교습소에 묘한 매력을 느낀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는 요청이 가당찮다는 듯 아빠가 일언지하에 퇴짜를 놓자, 켄지는 급식비를 빼돌려 몰래 피아노 교습을 받는다. 피아노 선생은 켄지에게 재능이 있다며 음악학교에 진학하기를 권하는데, 무서운 아버지가 피아니스트의 길을 쉽사리 허락할 것 같지는 않다. 가정형편을 알 리 없는 선생은 급기야 집으로 편지를 보내고, 편지는 하필 아버지 손에 들어간다(하긴 수취인이 아버지였으니). 바야흐로 거대한 폭풍이 켄지의 가족을 휩쓸 태세다.
<큐어>, <회로>, <절규> 등의 공포영화로만 구로사와 기요시를 아는 사람은 그의 2003년 작품 <밝은 미래>를 기억해야 한다. 그러니까 구로사와 기요시는 이미 5년 전에 ‘해체된 가족과 방황하는 청춘의 이야기’를 다룬 적이 있는 게다. ‘세대간의 가치관 충돌’을 묘사하던 그는 새로운 세대 앞에서 구세대는 반드시 패배할 것이며, 젊은 세대는 그들의 몫인 ‘밝은 미래’를 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세 주인공의 바깥으로 말썽쟁이 십대들을 따로 배치한 그의 목소리엔 어딘가 석연치 않은 데가 있었다.
새로운 세대 앞으로 밝은 미래가 놓여있다는 믿음은 수긍하겠는데, 그들이 과연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단 말인가? 구로사와 기요시는 자신의 굳은 입장만 밝혔을 뿐, 정작 <밝은 미래>의 내용은 온통 혼란스러움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기성세대’를 무조건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입장도 그리 정당하지 않았다(인터뷰에서 그는 ‘기성세대에게도 밝은 미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당신의 오해’라고 했다). <밝은 미래>가 바라본 미래는 오히려 어두워 보였으며, 그런 점에서 <밝은 미래>의 메이킹필름을 겸한 다큐멘터리에 <애매한 미래>라는 역설적인 제목이 붙은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2003년 칸영화제의 경쟁부문에 진출한 <밝은 미래>는 환영받지 못했다. 영화를 본 관객은 의례적인 박수조차 보내지 않았고, 같은 해 칸영화제에 등장해 ‘역대 최악의 경쟁작품’으로 낙인찍힌 <브라운 버니> 덕분에 <밝은 미래>는 최악의 수모를 간신히 면했다. 당시 객석에 앉아 있었던 나는 이후 오랫동안 서양인들의 무지를 탓했다, 그들은 동양인과 동양인 가족의 정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쿄 소나타>를 본 뒤 다시 <밝은 미래>를 보면서 마침내 이 영화의 자세에도 어느 정도 문제가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에 경도된 나는 그 동안 <밝은 미래>의 자세가 무조건 옳다고, <밝은 미래>는 무조건 좋은 영화라고 생각해왔던 것이다(물론 나는 아직도 <밝은 미래>를 좋아한다).
2008년, <도쿄 소나타>를 들고 칸영화제를 다시 방문한 구로사와 기요시는 열띤 반응과 함께 ‘심사위원상’을 거머쥔다. 혹자는 <도쿄 소나타>를 놓고 ‘구로사와 기요시가 그간 쌓아온 세계의 정점이다’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나는 <도쿄 소나타>가 이전 작품들의 주제와 정신을 계승한 부분보다 ‘변화한 지점’에 주목한다(상을 받았으니까 그 이유를 분석해보자는 게 아니다). 실제로 구로사와 기요시는 “<도쿄 소나타>가 새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그것은 자신의 신작에 대한 여느 감독의 구태의연한 미사여구가 아니라, 한 작가의 진심 어린 다짐에 해당하는 말이라 하겠다.
1950년대 이후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작가들을 선배 세대와 구분 짓는 건 ‘세상에 대한 비판의식’이다. 그들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에 앞서 ‘세상의 균열, 아버지 세대의 문제, 사라지지 않는 죄의식, 사회의 어두운 면’을 집요하게 파헤쳤으며, ‘조화를 이야기하기’보다 ‘현실을 이죽거리는’ 데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곤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지만 그들은, 세상이 그들이 원하는 것만큼 좋아졌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인간과 사회의 비극은 극복할 수 없는 것이었고, 자포자기한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계속 시비를 걸기만 할 것인가, 그들은 새롭게 질문했다.
대략 영화작가의 3,4세대에 해당하는 감독들은 자신들의 태도만으로는 세상의 변화를 끌어낼 수 없음을 알게 됐다. 젊은 세대가 항상 옳고 기성세대가 꼭 틀린 것만은 아니며, ‘비판과 충돌과 의심’이 결국 도달해야 할 지점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그래서 나는 2006년 개봉작 중 최고의 작품으로 마르코 벨로키오의 <굿모닝, 나잇>을 선택했고, 장 뤽 고다르가 근래 ‘2차대전과 유대인, 보스니아 내전’ 같은 ‘풀지 못한 전쟁 문제’와 ‘천국과 음악’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하고자 한다(‘음악’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말하겠다).
벨로키오와 고다르의 근작들이 세상을 바꾸려던 첫 번째 영화세대의 변화된 세계관을 반영한다면, 구로사와 기요시의 <도쿄 소나타>(그리고 카를로스 레이가다스의 <침묵의 빛>)는 그 다음 세대의 지향점을 대표할 작품으로 사료된다. 구로사와 기요시가 인터뷰에서 했던 말을 옮기면 이렇다. “나는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다시 한 번 내 영화를 만들어야 할 때라고 느꼈다. 내가 지금 가장 관심을 두는 주제는 ‘진정한 21세기는 과연 어떤 시대인가’이다. 21세기는 왜 혼란스럽고 어지러운가? 21세기는 왜 우리가 예전부터 그려왔던 미래의 모습과 다른가? 이렇게 된 것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그 대답을 찾는 것은 어렵다. <도쿄 소나타>는 내가 직면한 이 복잡한 문제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만들어졌다.”
위의 말을 통해 우리는 <도쿄 소나타>가 <밝은 미래>에 비해 좀 더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희망의 빛을 드러내게 된 배경을 파악할 수 있다. 켄지의 가족은 모두 밑바닥의 비극과 극한상황으로 내몰리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그들은 새롭게 일어선다(놀랍게도 가족 중 한 사람은 죽음으로부터 귀환하기까지 한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예전 작품 같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이것은, ‘현실이 어쩔 수 없으니 그냥 받아들이자’라고 말하는 TV드라마식 해법과 다르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새 주제는 현실의 수용이나 현실에 대한 적응을 의미하진 않는다(그가 그렇게 얄팍할 인물일 리 없다). 속 깊은 작가가 근심 속에서 만들어낸 ‘다시 태어나는 것’에 관한 이야기, 그것이 곧 <도쿄 소나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켄지는 드뷔시의 <달빛>을 연주한다. 그리고 꿈결 같은 연주가 끝난 뒤, 소년은 아빠와 엄마와 함께 스크린 밖으로 걸어 나간다. 왜 음악인가. ‘피아노 음악’은 다름 아닌 구로사와 기요시의 마음이다. ‘피아노 음악’은 인간이 만든 것 가운데 유일하게 완벽한 창조물이고, 신의 목소리에 가장 가까운 ‘피아노 소리’는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며, 그 아름다운 세계 안에서 소통과 조화와 구원의 싹이 숨쉰다. 먼 훗날, 소년은 바흐를 연주하게 될 것이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그 미래의 희망을 관객에게 보여준다. 정말로 감동적인 영화란 이런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영화계에서 ‘휴먼 드라마’는 한물 간 장르로 인식됐다. 그리고 한국의 영화를 주도하는 작가들은 장르와 유희하거나 B급영화와 랑데부하기를 즐기고 있다. 그런 영화들을 보면서 어른의 영화가 그리웠던 나는 <도쿄 소나타>가 한 대답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동안 구로사와 기요시는 인물들이 신체적으로 충돌하는 영화를 즐겨 만들었고, 그의 영화에선 인물의 죽음이 회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보였다. 그랬던 그가 새로운 목소리를 낸 게다. 물론 구로사와 기요시는 앞으로도 계속 공포영화를 만들 것이다. 그 작품들이 <도쿄 소타나>의 드라마를 재현하진 않겠지만, 그가 미래에 만들 공포영화의 핏빛은 이전 작품들의 그것과 분명 다른 색깔을 띨 것 같다(진실은 다음 영화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ibuti, 2009.3.21. 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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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6 14:59어렵지 않게 삶에 의미를 주는 이런 영화가 좋더군요. 구로사와 기요시의 오랜 팬으로서 그저 반갑게 본 영화였습니다. 집에 오는 내내 감동에 젖었더랬어요.
2009/03/26 23:27이 영화 후반부에 아버지는 죽은게 맞는거겠지요?
2009/08/09 03:07결말부분은 환상이라고 봐도 되는 걸까요?
그 장면은 '판타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제 판단으로는 아버지가 죽음에서 진짜로 살아왔다고 봅니다. 그게 영화의 희망의 메시지와도 어울리구요. 요즘 외국의 작가들은 은유적인 기법보다는,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걸 즐기기도 하구요. 하여튼 제 해석은 그렇습니다.^^
2009/08/09 23:54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