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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 영화관

Film: Comment2007/10/31 00:37 Posted by ibu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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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n Who's Planting Trees

<경계  Hyazgar> (장률, 2006)

연전의 <망종> 시사회장. 인사가 예정됐던 감독 장률은 오지 못했다. 제작자의 말에 의하면 감독의 비자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올해 초 모 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장률은 “할아버지 고향인데도 한국에 올 때마다 힘들다. 비자도 매번 다시 낸다.”고 했다. 그런 장률이 ‘경계’를 주제로 영화 한 편 만든 건 자연스런 일로 보인다. 국경처럼 사람들 마음 사이에 자리한 경계, <경계>는 바로 그런 경계에 대한 이야기다.

몽골의 변경 마을에 항가이라는 남자가 산다. 모래바람이 자꾸 불어와 초원이 사막으로 변하자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고 이젠 그의 가족만 남았다. 아내는 2년이 지나지 않아 이 지역 전체가 사막이 될 거라고 푸념하지만, 항가이는 포기하지 않고 매일 매일 나무를 심는다. 결국 딸의 눈 치료를 위해 아내와 딸마저 울란바토르로 떠난 날 밤, 술을 마시던 항가이에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문 밖에 선 사람은 웬 아낙과 꼬마. 다음 날, 아들은 길을 재촉하는 어미에게, 다리가 아파서 더 이상 못 걷겠다고 버틴다. 세 사람의 동거는 그렇게 시작된다. 항가이는 언어가 달라 대화가 불가능한 그들 모자가 중국인일 거라고 짐작한다. 그런데 라디오에서 나오는 <아리랑>을 소년이 따라 부르는 걸 보고 ‘아하, 당신들, 조선사람이군요’라고 말한다.

세 사람은 오래 살아 익숙한 사람마냥 하루하루를 보내고, 항가이는 먼길을 걸어와 지친 모자가 오래도록 쉬어가길 바란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울란바토르에서 온 전보로 인해 깨어진다. 남편을 초원으로부터 불러낸 아내는 남편이 도시에서 함께 살기를 원한다. 항가이는 초원으로 돌아갈 것인지, 도시에서 살아갈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초원에 태어나고 자란 항가이에게 선택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는 도시에서 현기증을 일으키고 병석에 눕는다. 그가 술을 먹고 구토하는 장소가, 거대한 도시 개발 현장 바로 앞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현대문명을 유지하는 건 경계의 문화다. 시멘트와 벽돌로 만들어진 벽, 유리로 만들어진 창은 거대한 철강과 결합되어 건물을 구성하고, 현대인은 그 안에 갇혀 단절된 삶을 산다. 그런데 현대인은 오히려 그 경계로 인해 보호받는다고,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소유와 욕망에 집착하는 현대인은 소유한 것을 뺏기지 않으려고, 욕망을 들키지 않으려고 용을 쓴다. 그들 사이에 벽이, 경계가, 수많은 비밀번호가 자꾸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언어와 민족과 영토의 경계를 초월한 항가이가 단 하나 충족시켜줄 수 없는 게 바로 그 소유의 욕망이다. 항가이는 현대문명과 현대인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항가이는, 도시의 편리한 삶에 익숙해진 자기 아내보다 자기와 함께 나무를 심는 있는 북조선의 모자에게 희망을 품는다. 그는 초원으로 돌아간다. 북조선의 모자는 과연 그를 기다리고 있을까?

장률의 영화는 참 경제적이다. 먼저, 인물들은 말을 아낀다. 세 사람은 툭툭 내던지는 말을 제외하면 하루 종일 몇 마디 이상 내뱉지 않는다. 그럼에도 세 사람 사이에 애틋한 감정이 싹트고, 그것이 대사가 아닌 몸짓과 먼 눈빛으로 전달된다. 신기한 일이다. 카메라는 또 어떤가.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을 따로 또 같이 담는 카메라는 그들을 멍하니 바라볼 뿐 움직이는 법이 없다. 그러다 누군가 이동하면, 혹은 카메라가 바라보는 공간의 좌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제야 슬쩍 시선을 움직여준다. 무슨 서비스라도 베푸는 것처럼... 장률의 영화가 대게 근대화 이전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것과 반대로 그의 영화는, 이른 바 장률식 경제성으로 인해 모던한 모습으로 완성된다. 장률 영화의 스타일은 전통적인 영화 형식은 물론 작가주의 영화의 영향으로부터도 벗어나 있다. 그와 비교할 수 있을 만한 작가로는 아키 카우리스마키 밖에 없다. 영화 내내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 듯하지만, 어느 순간 살이 베일 정도의 예리한 감성을 보여줄 때나, 관습적이고 지루하며 안일한 일상을 역동적으로 뒤집어엎을 때면, 두 사람이 약속이나 한 것 같다. (ibuti)

* 모자의 이름은 최순희와 창호다. 그들의 이름이 왠지 낯익다면 장률의 전작 <망종>을 기억하길. (배우는 다르지만) <망종>에서 중국 내 조선족으로 살아가던 모자의 이름이 바로 최순희와 창호였다. <경계>에서 북한을 탈출한 모자로 재등장한 그들은 <경계>의 마지막에서 또 다시 어디론가 떠난다. 그리고 창호는 ‘엄마, 큰 길이 보여요’라고 말한다. 그들 앞에 난 길은 그들이 걸어야 할 먼 여정을 보여주는 것 같고, 다리 위에 휘날리는 파란 깃발은 항가이가 그들에게 보내는 인사 같다. 세상에 던저진 두 사람이 국경을 넘나들며 만들어가는 여정이 장률 영화의 한 소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두 사람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서 다시 등장할지, 나는 궁금하다. 가까운 미래에, 이들 모자는 어쩌면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거치면서 우화의 모음집을 완성해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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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우유소년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궁금하네요. 두 사람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서 다시 등장할지.
    영화를 본 것은 아니지만.. 전작 <망종>을 마음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
    '창호'라는 이름에도 문득 눈길이 가고요 써두신 글을 보니.

    제가 부산에서 보았던 영화 <궤도>에도 엔딩크레딧 프로듀서인가 어떤 이름으로 '장률'이 들어갔었던 듯 해요 (그 영화는 정말로 마음이 아픈 영화. 곱씹으면 곱씹을 수록. 예전에 저는 <8월의 크리스마스>가 그랬었는데요. 고2 때인가 봐서 극장에서 볼 땐 그냥 편히 잡담 하며 봤는데 .. 오히려 극장을 나와서 일주일 동안 맴돌았던 기억이 나요 ^ ^ )

    ibuti님 쓰시는 영화글을 자주 모두 읽는 것은 아니지만
    읽을 때는 언제나 좋아하면서 읽고 있습니다

    '창호'라는 이름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발음의 느낌이 움츠러들기 보다는 나아가는 느낌이다.. 하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ibuti님은 어떤 이름을 갖고 계실까도 궁금해졌고요. (인사치레 같지만 정말입니다. ^ ^ )

    언뜻 무난해보이지만, 중심을 잃지 않고 영화를 짚으시며 친절하고 담백하게 쓰시는 영화 글들.. 그 속에서 인상적인 구절을 발견한 적이 몇 번 있답니다. 제가 본 영화일 경우 '나도 그렇게 느꼈는데..' 하면서 '내 마음에 잠자던 말을 밖으로 끄집어내면 저런 것이 될 수 있겠구나..'할 때도. 예를 들면 <커피와 담배> 마지막 부분에 대한 인상이 그랬습니다. 영화의 중요하고 깊은 부분을 건드리면서도 과장 않고 넘치지 않는 표현들 때문에, 와 닿고 또 기분 좋게 읽곤하는 것 같네요..
    들를 때마다 첫 화면에 뜨는 글이 달라져있어서 그런 성실함에도..

    저도 그런 성실한 블로그가 되었으면 좋겠는데요.. 음. ^ ^

    2007/10/31 03:18
    • BlogIcon ibuti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 이름은 제가 글을 쓰는 매체를 보시면 금방 아실 수 있는데... 이용철입니다. 평범하고 촌스러운 이름이긴합니다만. ^^

      그리고 제 글이 좀 밋밋하긴 하죠? 글 내용도 그렇지만 아무래도 요즘 젊은 분들이 즐겨 쓰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그럴 거예요. 그래서 몇 번 스타일을 바꿔보려고 했으나, 마음대로 되진 않더라구요.

      2007/10/31 23:59
  2. BlogIcon 우유소년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그리고.. 아키 카우리스마키 라는 이름은 처음 들었네요. 조금 궁금해지네요. .

    2007/10/31 03:17
    • BlogIcon ibuti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작품 중 많은 수가 부산영화제 등에서 소개되었고, 근작 두 편 <과거가 없는 남자>와 <황혼의 빛>이 국내 개봉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감독 중 한 명이에요.

      2007/10/31 23:55
  3. BlogIcon 우유소년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과거가 없는 남자> 보았었어요.. 하이퍼텍 나다에서 본 것 같네요. 폴란드인가 어느 나라였던가 그랬던 것 같네요. 괜찮게 보았던 기억이..

    2007/11/01 00:49
    • BlogIcon ibuti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게요,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를 보셨을 것 같았어요. 쉽게 기억할 이름은 아니라서 그럴 거예요. 저는 연말이 되면 그 해에 본 영화의 리스트를 만드는데요, <과거가 없는 남자>를 그 해 최고의 영화로 뽑았더랬어요.

      티스토리에 버그가 있는지 같은 글이 반복해서 뜨는군요. 우유소년님의 댓글도 같은 게 두 개가 동시에 떠서, 그 중 한개는 삭제하도록 할게요.

      2007/11/01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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