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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 영화관

Film: Special Column2008/07/01 02:13 Posted by ibu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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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릭 저먼 특별전>


* 아래는 <넥스트 플러스>에 기고한 글이다.


죽음을 앞둔 데릭 저먼은 <블루>가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 했다. 80분 가까이 화면을 지배하는 푸른색이 사라질 즈음 저먼은 ‘시간 속에서 우리의 이름이 잊혀질 것이며, 아무도 우리의 작품을 기억하지 않으리라’라고 읊조린다. 그러나 저먼이 푸른색을 화면 가득 배치하면서 고착된 이미지에 대한 부정을 시도했듯이, 그의 탄식 또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부정의 대상이 되고 만다. 그의 이름은 더욱 널리 알려졌고, 그의 작품이 차지하는 자리는 나날이 커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데릭 저먼의 작품들이 5년 만에 다시 우리 결을 찾아올 리 없는 것이다. 6월 27일부터 7월 10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데릭 저먼 특별전>은 그가 남긴 11편의 장편영화 전작을 상영하는 자리다. 여기서 11편 영화의 줄거리를 나불거릴 생각은 없다. 생전에 ‘내러티브 영화의 적’이라 불린 저먼의 영화에서 관객에게 말을 거는 것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내포한 이미지들이다. 영화 안에 줄곧 자신을 투영했던 저먼이기에 강렬한 이미지들은 그가 걸어온 여정의 기록에 다름 아니다. 이 글은 그 여정이 남긴 흔적을 서툴게 뒤쫓는 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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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스찬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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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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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페스트 (1979)


저먼의 모든 영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은 동성애의 이미지, 동성애에 대한 언급이다. 기숙학교 시절, 다른 소년과의 관계에서 목가적인 사랑을 발견했으나 기성세대로부터 끔찍한 존재로 취급받았던 저먼은, 성인 남성간 동성애 행위의 합법화 법안이 통과되고 자유로운 성의 분위기가 지배적이던 1960년대에 청년기를 보내며 성정체성 면에서 자기 확신에 이르지만, 80년대 중반, 호모포비아적인 법령인 ‘28조 법조항’이 입법되는 상황을 지켜봐야 했다. 그런 시기를 통과한 저먼에게 섹슈얼리티는 쾌락과 함께 고통을 상징했고, 관계에 있어 강박적이면서 수동적이었던 저먼은 욕망과 억압의 대립 상황을 경험하곤 했다. 저먼의 영화에서 동성애가 다양한 형태로 제시되거나 심지어 양극단으로 표현되는 건 그래서다.

대표적인 예로, 주디 덴치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읽는 <천사의 대화>가 목가적이고 이상적인 동성애를 다룬 아름다운 작품인 반면, 동성애를 탄압해온 역사의 희생양인 영국 국왕을 등장시킨 <에드워드 2세>는 저먼이 게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던 시기에 만들어진 만큼 분노의 불꽃이 이글거리는 작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를 퀴어 시네마와 연결한 <가든>에서 에이즈 논쟁의 한 중심이던 자신이 직접 출연한 것에서 보듯, 저먼의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게이들은 그의 분신인 양 느껴진다. 실제로 저먼은 <블루>를 찍은 뒤, 든든한 조력자였던 제임스 맥케이에게 “이제야 비로소 나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다”고 고백했다. 역사적인 인물들을 게이 아이콘으로 재해석한 <세바스찬>, <카라바조>, <전쟁 레퀴엠>, <에드워드 2세>, <비트겐슈타인> 등에서 저먼은 그들의 얼굴로 가장했던 것이다. 게이 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된 말년의 저먼은 남성 드랙 교단인 ‘종신 면죄부를 얻은 자매들’로부터 ‘성자’로 시성되었는데, 데뷔작 <세바스찬>이 동성애를 종교로 승화한 성인의 이야기였음을 떠올린다면 가슴 저미는 사실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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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대화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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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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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의 몰락 (1987)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부터 감독 마이클 파웰에 이르는 급진적인 낭만주의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저먼에게 기준점을 제공한 건 16세기 르네상스였다. 대영제국이 몰락하는 과정을 몸소 지켜보았던 그에게 16세기는 양가적인 측면이 있는데, 그 시기를 잃어버린 이상향으로 동경하는 한편 폭력적인 현실의 비극을 잉태한 근원으로 파악하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1세의 눈에 비친 대처시대의 타락한 영국을 그린 <희년>은 바로 그런 인식 아래 출발한 작품이다. 마찬가지로 저먼은, 영국 르네상스의 전형적 인물인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기초로 <천사의 대화>와 <템페스트>를 만든 바 있으나 나중엔 셰익스피어보다 어둡고 급진적인 크리스토퍼 말로의 <에드워드 2세>로 돌아서게 된다.

정원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사랑했기에 정서적으로는 전원시대를 그리워했지만, 반동적인 시각에서 인용되는 엘리자베스 1세 치하의 영국을 이성적으로 해석하고자 고심했던 저먼은 (<희년>에서 엘리자베스 1세의 조언자이자 당대의 사상가로 등장하는) 존 디의 카발라 신비주의에 한동안 심취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거기에다 카를 융의 <심리학과 연금술> 등을 읽으며 연금술 분야에 관심을 기울인 결과, 무의식적인 바탕 하에 시대를 파악하고 표현할 수 있기를 바랐던 저먼은 직관이 철학보다 현실을 더 확실히 깨우치게 해준다고 생각한 것 같다(<비트겐슈타인>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철학 따위는 집어치우고 현실을 개선하라고 말한다).

<희년>, <카라바조>, <대영제국의 멸망>, <에드워드 2세> 등의 작품에서 각 시대가 명확하게 구분되기는커녕 혼재되어 있고, 시대에 대한 묘사도 세세한 디테일을 따지기보다 절충의 방식을 따른 건 그런 연유에서 기인한다 하겠다. 그렇게 완성된 저먼의 실험영화들은 사실주의와 전혀 상관없지만 놀랍게도 시대의 혼란과 위기를 정확하게 기술하고 예언한다. <대영제국의 몰락>에서 소외되고 내쫓기며 처형되는 국외자들, 벤자민 브리튼의 음악을 시적으로 풀어낸 <전쟁 레퀴엠>에서 전쟁터로 내몰려 죽음에 휩싸이는 젊은이들, <가든>에서 현대의 악인으로 묘사된 기업, 교육, 미디어, 경찰의 모습은 저먼이 시대를 얼마나 비판적으로 읽고 있는지 잘 드러낸다. 이들 영화는 자주적인 삶의 방식과 정신적인 독립을 빼앗긴 인간에게 닥친 위협을 빌려 묵시록적인 미래를 경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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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레퀴엠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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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든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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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2세 (1991)

다시 <블루>로 돌아가서, 저먼은 ‘고통스러운 운명’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 질문한다. 그나마 낭만적인 <천사의 대화>에서조차 남자는 내내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니고, <세바스찬>의 세바스찬은 끊임없이 종교적, 성적 박해를 당하고, <희년>의 풋내기 가수는 헛된 유명세를 갈망하다 죽음을 맞고, <템페스트>의 요정은 프로스페로의 손아귀에 걸려 꼼짝달싹 못하고, <카라바조>의 카라바조는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대영제국의 몰락>의 소년은 황폐한 공간에서 헤로인으로 시름을 잊고, <전쟁 레퀴엠>의 무명병사는 죽어서도 철조망에 묶여 있고, <가든>의 게이 연인은 십자가를 짊어진 채 수난의 길을 걷고, <에드워드 2세>의 노동자 피어스 가베스턴은 귀족들의 침 세례를 견뎌야 하고, <비트겐슈타인>의 비트겐슈타인은 타인들의 몰이해와 철저한 고독 아래 신음한다.

그런데 이렇게 고통 받는 사람들의 영화가 비극적으로 아름다운 건 왜일까? 그건 아마도 절망과 두려움에 떠는 그들을 보듬으려는 저먼의 마음 때문이 아닐까 한다. 죽음의 벌을 키스의 꿈으로 바꾼 <에드워드 2세>나 마법을 동원해 낙관적인 상황을 구사한 <템페스트>에서 저먼은 제한적인 수단을 통해서나마 위안을 도모하려 했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내비친 <전쟁 레퀴엠>과 <가든>과 <에드워드 2세>의 마지막 장면에선 꿈을 버릴 뜻이 없음을 명확히 밝혔다.

다시 말하지만, 저먼은 무의식과 직관 속에 앞날을 예견한 인물이다. 푸른 화면으로 시작하는 데뷔작 <세바스찬>이 마지막 작품 <블루>와 이뤄낸 신비로운 조화가 그런 것이며, <희년>과 <대영제국의 몰락>과 <전쟁 레퀴엠>이 또렷이 알아맞힌 미래가 그렇다. 그가 꿈꾼 유토피아가 현재로선 요원해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가 죽을 때까지 간직한 사랑과 그의 염려하는 마음이 맺은 낙관의 힘을 믿는다. 그건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글의 끝을 <비트겐슈타인>의 마지막 대사로 갈음한다. “수수께끼란 없다. 일단 질문을 할 수 있다면 답을 얻는 것도 가능한 법이다.” (ibu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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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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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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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우유소년4L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데릭 저먼 회고전> 이라는 말에 댓글을 달 엄두를 내게 되었네요..
    참 오랜만이고요..
    잘 지내시죠?

    한동안 참 자주 오던 블로그였는데, 뜸해졌네요. 영화를 거의 보지 않고 있고요.

    오랜동안 일을 쉬다가 근래에 취직을 해서 무척 바빠요.
    무언가 다른 것들은 엄두를 못 내네요.

    넥스트 플러스를 손에 쥐어본 지도 참 오래되었어요...

    잘 지내고 있는 건지
    조금은 잘 모르겠네요. : ) ... ...

    건강하시고, 글 또 볼 수 있기를..

    2008/07/02 03:27
    • BlogIcon ibuti  댓글주소  수정/삭제

      간혹 들러주세요. 그러다 글 남겨주시면 그게 더 반가운 거죠.

      새로운 일을 하시게 됐군요. 전 직장이란 데를 다닌 지가 하도 오래 되어서 어떤 기분일지 궁금하네요. 좋은 성과 있기를 바랍니다.

      2008/07/03 17:08

Film: Special Column2008/05/15 00:51 Posted by ibu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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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츠 랑 회고전>


* 아래는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열리는 ‘프리츠 랑 회고전’을 맞아 필자가 ‘넥스트 플러스’ 50호 (2008.4.25)에 기고한 글이다.


프리츠 랑의 <달의 여인>(1929)에 등장하는 미치광이 교수는 감독을 닮았다. 지구상의 누구보다 달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잘 아는 교수의 진짜 바람은 달에 묻힌 금을 캐오는 것이다. 초라한 형편 탓에 꿈을 실현시킬 방안이 없는 그는 부유한 제자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 프리츠 랑도 그랬다. 당대의 어떤 감독보다 시대와 예술에 대한 비전을 갖췄던 랑은 영화가 대중을 위한 예술이라는 사실 또한 깨달았지만, 영화를 만들기 위해 이곳저곳을 떠돈 그의 인생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랑에 대한 잘못된 해석은 대부분 관객의 독일영화에 대한 오해와 거의 일치한다. 걸작 독일영화라고 하면 바이마르 시대의 영화를 반사적으로 떠올리는 관객에게 랑은 표현주의와 <메트로폴리스>의 감독으로만 인식됐으며, 그가 할리우드에서 만든 영화들은 한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유럽에서 할리우드로 건너간 에른스트 루비치와 알프레드 히치콕이 성공을 맛볼 동안 고집 센 망명자 정도로 취급당하던 랑이 <카이에 뒤 시네마>에 의해 재평가되기까진 오랜 시간이 흘러야 했다.

랑 영화의 복원과 회고전이 활발해진 것도 근래의 상황인데, 회고전을 준비하는 측이 개최만큼이나 역점을 둬야하는 중요한 부분은 40여 편의 영화를 특정 시기에 치우치지 않고 소개하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5월 9일부터 25일까지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열리는 <프리츠 랑 회고전>은 주목할 만하다. 상영작의 수가 무려 19편에 이르거니와, 초기작 <운명>부터 유작 <마부제 박사의 천 개의 눈>에 이르는 넓은 스펙트럼은 랑을 만나기에 더 없이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상영작들은 하나같이 어두운 비전을 띤 작품들로서, 그 배경을 알기 위해선 랑이 통과한 시간과 사건을 추적할 필요가 있다. 독일이 패전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데뷔한 랑은 나치가 득세하자 프랑스로 도망가야 했고, 이어 대공황의 기운이 가시지 않은 미국에 건너가선 과거의 영광을 포기해야 했으며, 냉전 시대엔 블랙리스트의 간접 피해자가 되기도 했다. 그런 그의 작품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사신과 싸우는 여인의 이야기인 <운명>은 어쩌면 랑이 자신의 운명을 예견한 작품일지도 모른다.

‘우파 스튜디오’의 어마어마한 재원을 총집결해 영웅 신화를 재구성한 <니벨룽겐의 노래>, 노동자들이 노예로 전락한 미래사회를 형상화한 <메트로폴리스>, 그리고 <운명>을 ‘죽음’이란 주제로 묶는다면, 범죄의 대가로 분한 루돌프 클라인 로게가 공포를 통해 사회와 국가를 마음대로 주무르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인 <마부제 박사 1, 2부>와 <스파이>를 묶는 주제는 ‘범죄’다. <엠>으로 연쇄살인마와 현대도시의 기이한 지형도를 그리며 표현주의와 이후의 누아르를 연결한 랑은 할리우드에 입성하면서 미국이 얼마나 암울한 곳인지 탐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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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에 범죄 드라마 <한 번뿐인 삶>과 뮤지컬 <당신과 나> 등을 발표한 랑이 1940년대 이후 진입한 곳은 훨씬 비관적이고 폭력적인 세계였다. <사형집행인 또한 죽는다>, <공포의 내각>, <창가의 여인>, <진홍의 거리>는 그 시기의 대표작이다. 1950년대에 냉전시대의 억압된 정서가 반영된 <빅히트>, <블루 가디니아>, <인간의 욕망> 등을 연출한 것을 마지막으로 랑은 미국을 떠나게 된다(이번 회고전에서 같이 소개되는 고전적인 모험 활극 <문플릿>은 다소 예외적인 경우다).

독일로 돌아간 그가 유작으로 남긴 <마부제 박사의 천 개의 눈>은 영화, 미디어, 이미지, 현대사회에 대한 실로 사려 깊은 목소리였다. 다시 처음으로 가서 질문해보자. 랑은 예언자인가, 단순한 목격자인가, 아니면 비주얼에 도통한 기교가인가. 20세기 중반 이후의 영화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한 감독은 장 뤽 고다르다. 그렇다면 이전의 감독 중 그 위치에 오를 사람은 누구일까? 그 대답은 앞선 질문의 대답에 따라 달라질 터, 회고전에서 각자의 답을 구해보길 바란다. (ibu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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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Special Column2008/05/08 13:00 Posted by ibu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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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 타르 회고전 (Bela Tarr Retrospective)


* 아래는 제9회 전주국제영화의 프로그램 중 하나인 <벨라 타르 회고전>과 관련해, 영화제 측에서 발행하는 일간지 ‘온감(On感)’에 기고한 글이다.


* 밝혀야 할 부분이 있다. 5월 6일, 나는 벨라 타르와 인터뷰를 했는데, 인터뷰 도중 나의 견해가 상당 부분 감독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아래 원고는 5월 2일에 쓴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글 도중 별도 마크해두었다. 인터뷰 기사는 따로 올릴 예정이다.

   <레드>와 <사탄탱고>가 같은 해에 나온 것은 사뭇 의미 깊은 사건이다. 동구권영화를 이끌던 세계적인 감독인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가 유작을 발표하고 사라진 자리에서 그의 바통을 이을 한 감독이 뒤늦게 예술영화계의 중심인물로 부상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벨라 타르의 <사탄탱고>는 흔히 ‘악마적인 걸작’으로 불린다. 문제는 타르의 영화를 접하는 관객에게 ‘걸작’보다 ‘악마’의 인상이 더 강하게 남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탄탱고>에서 가장 악명 높은 장면은 ‘비좁고 지저분한 집안에서 관찰하고, 쓰고, 읽고, 깜빡 졸고, 화장실에 가고, 술을 마시는 거구의 의사’를 보여주는 데 물경 30분이 넘는 시간을 할애한다. 어지간한 롱테이크에 익숙한 사람도 타르의 영화를 보다 나가떨어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러나 악마의 얼굴이 두려워 걸작과의 대면을 미룬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타르를 이야기할 때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와 키에슬로프스키의 이름이 종종 거론되는 건 예술적 성취 때문만이 아니다(이에 대한 진실과 오해는 아래에서 말하도록 하겠다). 그들은 예술 이전에 인간에게 깊은 관심을 가졌고, 고통 받는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한 사람들이다. 타르 영화의 진경은 형식주의 너머로 그의 마음을 이해할 때에야 눈앞으로 펼쳐진다는 걸 우선 명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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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르의 초기영화들은 이후 작품들과 외형상 전혀 다르다. 1970년대 중반, 헝가리의 젊은 영화인들은 기존 영화판에 대항해 다큐멘터리와 픽션이 혼합된 장르를 도모했는데, 영화학교에 다니면서 장편영화를 연출한 22살의 타르도 그런 경향을 따랐던 것. ‘가정 삼부작’으로 알려진 초기의 세 영화는 타르가 비전문 배우들과 함께 핸드헬드 카메라, 16미리 흑백필름, 극도의 클로즈업으로 일상의 사람들을 담으려던 시절의 결과물이다.

부모의 집에 얹혀사는 부부, 사회의 주변부를 겉도는 남자와 절박한 아내, 집을 마련한 중산층 부부가 각각 등장하는 <패밀리 네스트>, <아웃사이더>, <불안한 관계>는 일견 사회문제를 파헤친 드라마로 보인다. <패밀리 네스트>의 부부는 아이와 단란한 생활을 꾸릴 아파트를 열망하지만, 주택난 탓에 그들의 보금자리는 쉬 마련되지 않는다. <아웃사이더>의 주인공은 하루하루를 쉽게 살아가려는 남자인데, 아내는 그의 경제적인 무능력함이 지긋지긋하다. 집이 있는 부부가 나오는 <불안한 관계>에서도 해외근무 지원 문제로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벌어진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세 부부 관계의 악화는 아파트나 경제문제 같은 외적 조건이 아닌 다른 원인에서 기인한다. 며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시아버지와 아내를 의심하는 남편, 사회의 요구에 적응하지 못하는 남자와 그의 형제와 잠자리를 한 아내, 가족의 무게를 견디기 힘든 남자와 그를 배려하지 못하는 아내는 문제의 근원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 채 결말을 맞는다. <패밀리 네스트>의 부부는 눈물로 재결합을 갈망하고, <아웃사이더>의 남자는 2년간의 군복무 후의 변화를 기대하며, <불안한 관계>의 부부는 화해를 축하하는 의미로 세탁기를 구입하면서 세 영화는 끝난다.

중요한 사실은, 세 편 영화의 인물들에게 바뀐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 타르가 시선을 넓혀 보다 보편적인 문제를 인식하게 됐다는 것이며, 그것에 맞춰 영화의 형식적인 변화가 필연적으로 뒤따랐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스타일 면에서 판이하다는 이유로 타르의 초기영화와 이후 작품들을 굳이 구분 지을 필요는 없다. 좁은 아파트 내에서 발생한 문제들이 인간관계에 대한 폭넓은 질문으로 확장되었을 따름이다.


   (단 두 개의 쇼트로 이루어진 실험적인 중편 <맥베스>와) <가을>은 앞뒤 작품들의 연결부라기보다 과도기적인 성격이 강한 작품이다. 아파트 내부에서 벌어지는 인간들의 (권력) 다툼은 초기의 삼부작을 기억하게 하지만, 타르는 다큐멘터리의 흔적을 의도적으로 제거하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은 고급 아파트를 소유한 병든 노파와 그녀의 재산을 탐하는 아들, 노파에게 주사를 놓는 간호사와 그녀의 연인, 그리고 노파에게 빌붙게 된 선생이다.

아파트 밖으로 절대 나가지 않는 카메라는 편집증에 사로잡힌 그들 다섯을 프레임 안으로 옥죄면서 관객의 밀실공포증을 유발하는데, 타르의 영화 중 보기 드문 심리드라마인데다 제한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실내극의 형식을 띄고 있어서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영화가 연상되기도 한다. 부감 쇼트, 앙각 쇼트 등 다양한 카메라 앵글과 협소한 공간을 보완하는 카메라의 움직임,  양식화된 조명과 색채의 구성, 연극 톤의 대화 등을 구사해 한 편의 실험영화를 보는 듯한 <가을>은 감독의 형식에 대한 점증하는 관심이 반영된 작품이라 하겠다. 언젠가 타르는 자기 영화가 코미디라고 말한 적이 있다. <가을>의 결말부를 장식하는 <Whatever will be(케 세라 세라)>는 그 말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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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멸>과
이후 공교롭게도 7년 간격으로 발표된 영화들은 관객과 평단의 머릿속에 타르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파멸>, <사탄탱고>,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를 통해 타르는 대가들의 리스트에 오르는데, 그것은 그가 극한의 형식을 좇는 스타일리스트임과 동시에 현실에서 발을 떼지 않는 리얼리스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파멸>은 탄광 마을에서 허송세월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바에서 술을 마시는 게 일과의 전부인 그는 사랑과 배신, 복수 끝에 삶의 밑바닥에 다다른다. 탱고의 12 스텝에 상응하는 12개의 챕터로 구성된 <사탄탱고>는 외딴 집단농장에서 벌어지는 섬뜩한 음모와 인간관계의 실패와 믿음의 부재에 관한 드라마다. 7시간의 지독한 우울 끝에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굴레와 직면하는 관객은 울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하는 기이한 수렁에 빠지고 만다.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는 타르의 미적 시도가 절정에 오른 걸작이다. 시골 마을에 유랑 서커스단이 도착한다. 세상에서 가장 큰 고래와 일명 ‘왕자’가 동반 출연한다는 약속과 달리, 왕자는 기대처럼 아름다운 존재가 아니었고, 흉측한 고래가 덩그러니 도착하자, 사람들 사이에 폭력의 기운이 싹트고, 마을의 밤은 종말을 향해 치닫는다.


세 영화를 두고 먼저 언급해야 할 부분은 영화의 형식이다. 카메라의 움직임은 기존의 어떤 영화보다 느리고, 어느 순간 멈춰 선 카메라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영화의 시간 개념에는 흥미가 없다는 듯, 타르는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시간과 공간의 지속성이 기필코 보장되어야 한다고 본다(타르에게 롱테이크는 미적 개념이 아니다). 설령 관객의 인내에 반하고 이야기의 전개에 방해가 된다 할지라도, 타르는 인간의 행동은 물론 그 아래 위치한 동기, 심리까지 철저히 파악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릴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또한 타르가 말했던 바, 그는 카메라만큼 영화의 외형에 공헌하는 풍경과 날씨 그리고 소리를 제 2의 주인공으로 여긴다. 황폐한 토지와 무너져 내리는 가옥, 추적추적 한없이 내리는 비와 몸을 날려버릴 기세로 부는 세찬 바람, 스크린 안팎에서 삽입되는 자질구레한 음향, 아코디언에 기반을 둔 구슬픈 음악은 인물이 처한 현실과 비극을 적나라하게 밝히는 주요한 장치로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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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건대 타르 영화의 형식주의를 외형과 아름다움에 도취한 자의 헛된 산물로 보면 곤란하다. 그에 따르면, 그의 영화의 목표는 이야기하기가 아니라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 사람들의 매일의 삶을 이해하는 것’에 있다. 타르에 대한 오해 중 하나는 그의 세계가 타르코프스키와 키에슬로프스키의 그것과 같은 영역에 속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기실, 타르의 영화는 삶의 신비나 형이상학적인 질문에는 일차적인 관심을 두지 않는다(굳이 타르와 가장 가까운 거장을 선택해야 한다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적절한 대답일 것이다).

이 사실은 타르가 <파멸> 이후 소설가 라즐로 크라스나호르카이와 공동으로 작업하고 있다는 걸 감안했을 때 언뜻 이해하기 힘든 부분인데, 두 사람은 정치적 알레고리와 현실에 대한 은유로 가득하다는 크라스나호르카이의 작품에다 영화의 옷을 입히면서 기존의 추상적인 관념을 다 버리고 현실의 문제라는 단순하고 명확한 세계로 진입하도록 해놓았다.

부언하자면 타르는 자신의 영화가 우의적이고 상징적인 상태에서 탈피해 ‘명확한’ 존재가 되기를 원한다.
삶의 실체에 명쾌하게 접근한 그의 영화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우리는 왜 현재의 모습처럼 되어버렸는가, 우리는 왜 죄를 짓고 사는가, 우리는 왜 서로를 배신하는가, 우리는 왜 하찮은 물질을 탐하고 그것에 집착하는가, 우리는 왜 삶의 질을 추구하지 않는가, 우리는 왜 몰이해, 반목, 갈등, 다툼, 의심, 폭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가.’ 그런 이유로,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에서 노동자들이 병원으로 난입하는 장면은 타르가 이룩한 최고의 성과라 칭할 만하다. 욕구를 억제하지 못해 죄 없는 환자들을 닥치는 대로 구타하던 폭도들은 발가벗겨진 채 남루한 모습으로 서 있는 노인을 보자 폭력을 멈춘다. 그들은 자신의 초라하고 구차한 현실을 직시했던 것이다. (* 이 부분에 대해 감독은 ‘뒤에 벽이 있어서 멈춘 것이다’라고 했다. 인터뷰에서 구체적인 것을 확인하길 바란다)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첫째는 타르의 영화가 우울한 현실을 확인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냐는 것이고 둘째는 명확하게 만들었다는 타르의 영화를 해석하는 게 왜 그렇게 힘드냐는 것이다. 타르의 영화가 우울한 비전과 세상을 향한 비관을 보여준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관객의 눈을 믿는 타르는 자신이 먼저 대답을 들려주지 않으려 한다. 자신은 솔직하고 공평하며 정직한 영화를 만들 뿐, 그것을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며 이성으로 자각하는 사람은 관객이라는 것이다. 타르가 어떤 감독이냐면, 관객이 자기 영화의 동반자라고 항상 믿는 사람이다.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해서 그가 결코 책임을 회피하려는 게 아님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해석이 쉽지 않은 영화는 그의 의도를 따른 것이다. 우리 주변엔 타르의 영화 속 상황보다 더 이해하기 힘든 일들로 가득하다는 걸 우리는 잊고 있다. 사람들은 쉽게 풀지 못하는 문제로부터 눈을 돌리기 십상이고,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하나둘 쌓일 때마다 사회는 더욱 못마땅한 곳으로 변해 간다.
타르는 관객들이 자신의 영화를 본 뒤 해석을 위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세상을 다른 시선으로 보지 않으면, 다른 삶을 이해하고 경험하지 않으면 혁명 혹은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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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르가 2007년에 발표한 <런던에서 온 사나이>는 주류 평단으로부터 호평을 얻지 못했다. <파멸>에서 누아르 장르를 존재에 대한 심오한 질문으로 연결했던 타르가 다시 시도한 누아르는 전작들에 비해 평범한 이야기하기에 머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런던에서 온 사나이>는 타르의 또 다른 변화가 감지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충분한 작품이다.

그간 타르의 영화엔 신 또는 신의 대리인으로 행세하는 인물이 등장해왔다. <가을>의 노파, <파멸>의 술집 종업원, <사탄탱고>의 지도자,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의 백치 소년은 사건과 인간관계를 꿰뚫고 있으며, 다른 인물들에게 지혜의 말씀과 조언을 들려주는 캐릭터들이다. 그러나 종래엔 그들조차 편협함과 미약함과 사악함의 얼굴을 내밀고 급기야 정신을 잃는 상황에 도달하는 걸 보면서, 아직까진 구원이 요원한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런던에서 온 사나이>에서 이에 해당하는 캐릭터는 수사관인데, 그는 놀랍게도 인간을 향해 자비를 베푼다. “몸을 보살피라”는 말로 염려를 표하고 용서의 기적을 행하는 인물은 이전의 타르 영화에 없었으며, 타르의 영화를 보다 따뜻한 심성을 느낀 것도 아마 처음일 게다. 타르 영화의 오프닝에는 영화를 헌정할 사람의 이름이 소개되곤 한다. 타르는 이번 영화를 만드는 도중 자살한 제작자 윔베르 발상에게 <런던에서 온 사나이>를 바쳤다. 그래서일까, 영화에는 적으나마 낙관의 여운이 남아 있다. 그것이 필자의 생각대로 변화의 조짐일지 아닐지는 그의 다음 작품만이 말해줄 것이다. (* 위 두 단락에서 언급한 캐릭터와 <런던에서 온 사나이>에 대한 감독의 해석은 내 글과 정 반대의 것이었다. 역시 인터뷰에서 확인하길 바란다)



관련 글
2007/12/14 - [Film: HomeVideo] - 사탄탱고 (벨라 타르,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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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Special Column2008/05/08 10:23 Posted by ibu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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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류튼: 그림자 속의 사나이
(Val Lewton: Man in the Shadow)


* 아래는 제9회 전주국제영화에서 상영된 <발 류튼: 그림자 속의 사나이>와 관련해, 영화제와 씨네21이 발행하는 공식일간지에 기고한 글이다.


오스 웰즈의 영화가 RKO의 재정 위기를 초래한 1942년, 구원투수로 등장한 사람이 발 류튼이다(훗날 최고의 작가로 위치한 웰즈와 B급영화를 제작하던 남자를 나란히 언급하게 만든 사연은 영화사의 한 아이러니라 하겠다). RKO가 바랐던 건 1930년대에 유니버설 사가 제작한 ‘몬스터’ 시리즈처럼 관객의 흥미를 확 잡아끌 오락거리였을 텐데, 류튼의 목표는 좀 더 높았다. 데이비드 O. 셀즈닉 휘하에서 영화경력을 시작한 류튼은 저예산으로 제작된 질 좋은 영화를 내놓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자율권을 보장받은 류튼은 감독, 촬영, 각본, 미술, 음악을 담당할 지인들로 ‘호러 사단’을 구성했고, 그의 사단이 발표한 일련의 작품들은 호러영화의 역사를 바꾸게 된다.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절, 불세출의 제작자들이 이름을 날렸지만, 류튼의 존재감은 그 중 각별하다. 짧은 기간 동안 호러영화 장르에 전념했던 그는 일개 제작자의 역할을 넘어서는 일들을 해냈다. 셀즈닉의 영향을 받아 영화의 제작 과정 전체를 통제하길 원했던 그는 캐스팅, 미술, 의상, 편집 등에 관여한 것은 물론, 모든 각본마다 손을 대야 직성이 풀렸다. 영화에 입문하기 전 잡다한 분야에서 글을 써댄 경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는데, 그의 지시사항이 일일이 기록된 각본은 감독의 머리 위에서 연출을 지휘, 관리하는 것과 진배없었다. 연출을 맡은 자크 투르네르, 로버트 와이즈, 마크 롭슨이 나중에 대가 또는 작가로 성장했음을 감안하면, 혹자는 한낱 제작자가 왜 항상 먼저 언급되는지 의아할 게다. 이유는 간단하다. 발 류튼의 영화에 대한 일관된 비전이 감독을 뒤로 밀어낼 만큼 대단했다는 것이다.

류튼 사단은 첫 두 작품 <캣 피플>과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로 그들의 의도를 선명하게 밝혔다. 영화는 결코 죽음과 폭력을 직접 보여주지 않았고, 괴물이 사라진 자리에 ‘어둠과 그림자’의 세계가 등장했다. 숨기를 거부한 주인공이 제 발로 어둠 속으로 들어가 매혹을 맛보는 사이, 너울대는 그림자와 꺼림칙한 소리를 실감하며 스크린 밖을 상상하는 관객은 전혀 새로운 공포를 경험했는데, 그건 정녕 아름다운 공포였다. 대표적인 예로, <시체 도둑>에서 보리스 칼로프가 모는 죽음의 마차가 눈 먼 여가수의 뒤를 조용히 따라가는 장면의 슬픔과 공포와 아름다움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힘들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류튼의 영화가 비단 스타일의 추구에 그치지 않고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의 대립을 통해 전복적인 환상성을 성취했다는 점이다. 신, 이성, 현실, 과학, 정신분석은 매번 악마, 미신, 전설, 심령, 마법과 충돌하고, 선과 악의 경계가 흐려진 지점에서 주인공과 관객은 이성적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에 빠진다. 그것은 이전 영화들이 한 번도 닿아보지 못한 영역이었으며, 현대의 호러영화와 판타지영화는 그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두 편의 영화로 성공을 거둔 류튼은 <레퍼드 맨>, <일곱 번째 희생자>, <유령선>, <캣 피플의 저주>를 연거푸 만들면서 입지를 강화하는 듯했지만, 방향을 선회해 만든 시대극과 드라마의 실패와 호러 아이콘 보리스 칼로프의 도움으로 의욕 넘치게 제작한 <바디 스내쳐>, <죽음의 섬>, <배들램>의 부진 끝에 RKO를 떠나 스튜디오를 전전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류튼은 A급영화를 제작하기를 열망한 B급영화 제작자였다. 그러나 류튼이 드라마, 시대극, 코미디를 시도할 때마다 그르침과 미완성을 반복했다는 사실은 그의 본령이 ‘공포’의 영역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게 아닌가 싶다. 난 궁금하다. ‘그가 자신을 영화계의 에드가 앨런 포우로 규정했다면 이후 삶이 어쩌면 바뀌지 않았을까, 그는 자기 영화가 ‘해머 호러’ 같은 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리란 걸 예감했을까.’ 이제는 걸작으로 대우받는 아홉 편의 호러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마흔일곱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그를 애도하곤 한다.


류튼의 삶과 영화를 다룬 다큐멘터리 <발 류튼: 그림자 속의 사나이>를 연출한 켄트 존스는 <링컨 필름 센터>의 프로그래머, <필름 코멘트>의 편집위원 등으로 활동하는 영화평론가이자 작가다. 연출과 각본을 겸한 존스는 깔끔한 영화 분석과 역사적 사실 그리고 애정 어린 헌사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고 있는데, 연대순으로 정리된 작품의 클립은 류튼을 몰랐던 관객에게 친밀한 안내서로 손색이 없다. 류튼의 열광적인 팬인 마틴 스콜세지(존스는 스콜세지의 <나의 이탈리아 영화 여행>의 각본에 참여한 적이 있다)가 다큐멘터리의 제작자와 내레이터로 나섰으며, 그 외에 평론가와 감독들이 인터뷰에 임했다. 그들 가운데 B급영화의 대부 로저 코만과 저예산으로 A급 공포영화를 만드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출연이 인상 깊다. (ibu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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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Special Column2008/04/15 03:08 Posted by ibu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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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공주(1919)


* 아래는 <박창수, 루비치를 연주하다> 특별전에 부쳐 씨네21 649호(2008.4.15)에 기고한 글이다.



<박창수, 루비치를 연주하다>


에른스트 루비치의 영화 세 편이 한국 관객을 찾는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피아니스트 박창수의 연주와 함께 <굴공주>, <남자가 되기 싫어요>, <들고양이>를 감상하는 이번 프로그램은 4월 15일부터 사흘 동안 열리는 ‘2008 서울 프리뮤직 페스티벌’의 일환이다.
 
루비치의 영화는 영화광과 영화평론가들의 취향을 따른 시네마테크의 대부분 메뉴들과 전혀 다른 세계에 산다. 보다보면 저절로 배를 움켜쥐게 되는 루비치의 영화는 비밀의 문을 관객에게 활짝 열어놓는다. 골치가 아픈 건 평론가 쪽이다. 그들은 그 비밀을 도저히 분석하거나 설명할 수 없으며, 억지로 분석을 시도했다간 웃음의 마법만 산산이 부서진다. 오죽하면 그들이 ‘루비치 터치’라는 말로 적당히 얼버무리려 했을까. ‘루비치 터치’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를 ‘서스펜스’로 다 설명하려는 게으른 태도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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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되기 싫어요 (1918)


루비치의 조력자로 활동했던 의상디자이너 알리 휴버트는 루비치의 영화인생 25주년을 기념해 콜라주 앨범을 헌정한 적이 있다. 휴버트는 ‘루비치의 부엌’이란 스케치에다 루비치가 영화를 만드는 데 사용한 양념으로 ‘활력, 유머, 사랑, 마음’을 그려 넣었다. 거기에 빠진 게 있다면 ‘관객들의 지적 능력’이다. 루비치는 모든 관객의 지적 능력이 자기 영화의 빈 공간을 채워준다고 믿었고, 영화는 관객의 참여로 완성된다고 생각한 사람이다. 이것을 일찍이 파악한 장 르누아르는 “루비치가 현대적인 할리우드를 창안했다”고 말했다.

이번에 상영되는 세 편은 루비치가 베를린에서 만든 작품들이다. 루비치 터치가 양식적인 정점에 오르고 진한 인간미를 풍기는 후기 작품들이나 뮤지컬과 우아함과 웃음이 포복절도의 상황으로 이끄는 중기작품들에 비해 베를린 시절의 작품들은 투박하다. 그러나 루비치의 영화가 비단결 터치에 이르기 전에 누에고치에서 잠자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는 건 분명 의미 있는 일이며, 초기 코미디라고 하면 찰리 채플린과 버스터 키튼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유럽 코미디의 향취를 맛보게 해줄 기회다.

사실 루비치는 배우로서 원하는 역할이 더 이상 주어지지 않자 다른 길을 모색하다 감독이 되었는데, 막스 라인하르트 밑에서 연기 수업을 쌓았던 그는 자신을 천부적인 배우라고  생각했다. 그의 초기영화에서 슬랩스틱과 과장된 연기가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건 그런 연유에서 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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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고양이 (1921)


루비치가 베를린 시절 영화 중 최고로 꼽은 <굴공주>는 미국 부호의 딸이 진짜 왕자와 결혼하기를 고집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미국을 자본의 나라, 유럽을 귀족과 고결함의 상징으로 파악하는 루비치의 사고방식과 ‘루비치 터치’의 초기 형태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남자가 되기 싫어요>에서 주변의 간섭이 귀찮아진 말괄량이는 양복을 입고 하루를 보낸 뒤 생각을 바꾼다. 양복을 입은 두 사람의 키스와 포옹 장면이 담긴 이 영화를 재발견한 건 게이와 레즈비언 운동가들이었고, 이후 영화는 다수의 게이 필름 페스티벌에서 상영되며 유명해졌다. <들고양이>는 도적 떼를 이끄는 두목의 딸과 그들을 소탕해야 하는 국경수비대 장교의 사랑을 다룬 작품이다. 당시 독일영화계를 휩쓴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아 표현주의 경향의 세트를 과감하게 도입한 실내장면이 인상적인데, 상업적인 실패 탓인지 루비치가 그리 만족하지 못한 영화로 남았다.

세 영화에는 무도회 혹은 축하연 장면이 공통으로 등장한다. 춤을 좋아했던 루비치의 영화에서 자주 삽입되는 무도회 장면은 감정적인 클라이맥스를 형성한다.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기상천외한 설정, 연주, 춤으로 가득 찬  무도회는 전복의 쾌감을 부추기며 한없이 이어지다 오직 루비치의 나라에서만 살 법한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을 인정할 즈음에야 끝을 맺는다.

루비치 영화의 가장 긍정적인 효과가 ‘웃음으로 인한 삶의 낙관’이라면, 반대로 주의해야 할 점은 ‘중독성’이다.  어느 쪽이 되었든 결과는 ‘행복감’일 테니, ‘천국의 웃음’을 위해 자리를 예약하길 바란다. 이번 프로그램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박창수는 무성영화의 연주를 이미 여러 번 맡은 바 있다. 숨을 죽이며 탄식하는 순간부터 폭풍우가 몰려오는 바다의 긴박감까지 들려줬던 그의 피아노가 이번에 관객의 웃음과 만나 어떤 폭발력을 보여줄지 기대된다. (ibuti)



관련 글
2008/04/15 - [Film: Garage] - 박창수, 루비치를 연주하다 (2008.4.15 ~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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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Special Column2008/03/11 23:11 Posted by ibu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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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들 The Dead (존 휴스턴, 1987)


존 휴스턴의 유명한 영화들 대부분은 문학작품에 바탕을 둔 것이다. 대쉴 해미트의 소설을 각색한 <말타의 매>로 데뷔해 40여 편의 영화를 연출했던 휴스턴은 마지막 한 편을 위해 제임스 조이스의 <죽은 사람들>을 선택했다. 이미 죽음을 예고 받은 상태에서 힘겹게 만든 전작 <프리찌스 오너>에서도 자신의 전공인 누아르를 블랙코미디로 변형해 내놓았던 그였다. 그러니 누가 봐도 <죽은 사람들>은 이상한 선택으로 보였다. 소설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파티는 별다른 이야깃거리가 되지 못하는데다 이어지는 클라이맥스인 한 남자의 심리적 여정 또한 영상으로 표현하는 게 쉽지 않다. 그래서 영화화가 불가능하다고 평가 받는 <죽은 사람들>은 휴스턴이 그간 손댔던 스릴러나 누아르, 액션물은커녕 드라마용 소품으로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휴스턴이 휠체어와 산소호흡기에 의존하면서까지 <죽은 자들>에 매달렸던 이유는 무엇일까.


<죽은 자들>은 하룻밤의 이야기다. 존 휴스턴의 아들 토니 휴스턴이 각색한 각본은 조이스의 원작을 거의 그대로 따랐다. 중요한 대사는 물론 사소한 상황 하나하나도 원작에 기대고 있는 영화는 마치 ‘그 자체로 위대한 이야기인 원작을 손대지 않을 때 가장 훌륭한 각색이 나온다.’는 원칙을 세운 듯하다. 그러므로 작품집 <더블린 사람들>의 출판과정에서 글자 하나를 수정하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았던 조이스로서는 현재의 각색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 같다. 1904년의 더블린, 예수공현축일로 짐작되는 날(원작에도 날짜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의 파티에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이 모여든다. 파티의 개최자인 줄리아, 케이트 모건 자매와 그들의 조카 매리 제인이 손님들을 반겨 맞이하고, 그들은 대화와 연주, 작은 무도회, 정성들여 준비한 만찬을 함께 즐긴다. 그리고 새벽이 가까운 시간, 손님들은 서로 작별한 다음 각자의 길로 떠난다.


영화의 80분에서 60분이 지나도록 관객은 왜 이 영화의 제목이 <죽은 자들>인지 알 수 없다. 도대체 누가 죽는단 말인가. 고령의 줄리아가 혹시 죽을지 모른다고 짐작할 뿐이다. 손님들이 헤어질 무렵, 영화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가브리엘 콘로이는 계단 아래에서 아내의 모습을 본다(이 부분에서 소설이 남자의 심리와 들리지 않는 음악을 상상하게 하는 반면, 영화는 심리적 묘사와 상상을 희생한 대신 아름다운 노래의 실체를 직접 느끼게 한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는 아내에게 성적 욕망을 느낀 그는 호텔로 돌아와 자신의 감정을 채울 방도를 찾는다. 하지만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오히려 그를 당혹하게, 화나게, 난처하게 만든다. 파티의 손님으로 왔던 테너가 부르는 <오그림의 처녀>를 듣고 오래 전의 한 소년을 기억했다는 아내는 그와의 애틋한 사랑과 소년의 때 이른 죽음에 대해 고백하면서 오열한다. 마침내 지쳐 잠든 아내를 연민의 눈길로 바라보던 가브리엘은 자신의 삶 속에 존재하지 않았던 순수한 사랑과 뜨거운 열정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고, 창밖의 눈을 보며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다 뜨거운 회한의 눈물을 흘린다. 남자의 내면이 영혼의 정화를 경험할 동안, 소리 없는 눈이 아일랜드 전역에 내린다.


단편집 <더블린 사람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죽은 사람들>은 가장 유명한 영문소설 중 한 편으로서 조이스의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인 ‘에피파니’의 개념이 두드러진 작품이기도 하다. 이는 소설의 배경이 1월 6일, 즉 ‘예수공현축일(epiphany)'인 것과도 무관하지 않은데, 바로 그날 주인공은 ’현현‘을 체험한다. 교수와 작가로 활동하는 가브리엘은 가족의 자랑거리이지만 지식인의 얄팍한 가면을 버리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새벽에 일어난 자그마한 사건으로 인해 그의 정신은 각성하고, 새로운 부활의 계기가 마련된다. 휴스턴이 <죽은 사람들>에서 찾아낸 건 바로 그 ’에피파니‘일 것이다.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황금기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긴 세월에 걸쳐 영화를 만들었던 휴스턴은 감독 외에도 배우, 화가, 권투선수, 작가의 삶을 살면서 인생의 다양한 면모를 뒤쫓았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선조들이 살았던 아일랜드로 돌아가 인생을 되돌아보며 발견한 게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모르는 가운데, <죽은 자들>은 그것을 대강 짐작할 만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존 휴스턴이 가브리엘 콘로이라는 인물에 자신을 얼마나 투영했는지 알기 위해서는 영화의 마지막 5분을 보는 것으로 족하다. 영화의 주인공과 감독에게 조금이라도 동화되었다면, 적막한 아일랜드의 풍경을 보면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추기란 힘들고도 힘든 일일 게다. 재미있고 기술적으로 뛰어난 존 휴스턴의 영화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떤 영화를 선택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하겠다. 그런데 성숙한 휴스턴의 영화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달라진다. <팻 시티>와 함께 <죽은 자들>은 휴스턴의 다른 영화에 비해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휴스턴과 정서적으로 교감하고 싶다면 <팻 시티>를, 정신적으로 교감하고 싶다면 <죽은 자들>을 보아야 한다.


언뜻 유럽 예술영화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는 <죽은 자들>은 사실 할리우드에서 잔뼈가 굵은 장인들의 손때가 곳곳에 묻은 작품이다. 음악의 알렉스 노스, 미술의 스티븐 그라임즈, 의상의 도로시 지킨스 등은 모두 휴스턴과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할리우드의 수많은 고전들에 참여한 뒤 마찬가지로 휴스턴과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다. 그들이 만년에 힘을 합쳐 만든 <죽은 자들>에선 일체의 인공미가 느껴지지 않는다. 있는 듯 없는 듯 희미하게 드리워진 연출의 그림자 아래 한 치의 드러냄도 없이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만들어놓은 영화는 그야말로 자연스러움의 경지에 올라 있다. 동시대의 어떤 작품도 그 품격을 넘어서지 못했으며, 아울러 존 휴스턴의 흑백영화에만 익숙한 자들에겐 기적 같은 순간이 되었다.


* <존 휴스턴 회고전>을 맞아 발간되는 소책자용으로 쓴 글이다.

* 1987년 1월에 <죽은 자들>을 찍기 시작해 4개월 만에 작업을 마친 휴스턴은 그 해 8월에 세상을 떠났다.


* 조이스의 원작소설은 <죽은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번역됐고, 이번에 상영되는 영화에는 <죽은 자들>이란 제목이 붙었다. 그래서 글 중 소설에 해당하는 부분에 한해 <죽은 사람들>로 따로 구분해서 썼다.

관련 글
2008/03/09 - [Film: Garage] - 존 휴스턴 회고전 (2008.3.15 ~ 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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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Special Column2008/03/07 14:22 Posted by ibuti